감사하게도….

계속해서 울리던 간사들 카톡 대화도 좀 잠잠해지고,
종군기자와 같이 종횡무진 달리던 ㄱㄷㅇ간사님의 블로그도 마무리 모드이고…
이제 wrap-up만 남은 모양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아직 모든 일들을 다 마무리하려면,
간사들이야 할일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좀더 상세히 들어봐야겠다.

mp3 file들 언제 팔기 시작하려나… ㅎㅎ

신학은 – 설명의 도구? 선동의 도구?

내가 생각하기에,
신학은 일차적으로 설명의 도구이지 선동의 도구는 아니다.
(물론 적절한 설명과 해석의 결과로서 선동이 불가피하게 따라올수는 있겠지만 서두…)

신학이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 세상, 인간, 피조세계, 궁극적 실재등이고,
그러한 ‘개념’들이 context 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context를 그러한 개념들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도 그 내용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역사적으로 신학을 선동의 도구로 사용했던 시도들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콘스탄티즘, 중세의 교권주의 신학,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제국주의 신학 등등…

물론 그 경계가 대단히 모호한 경우도 많다.
가령, 남미의 해방신학은 설명의 도구였던가 선동의 도구였던가.
(설명을 하다보니 그것을 통해 어떤 논리가 나왔고, 그것이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이 선동의 도구로서 활용되면 그것은 일종의 slippery slope 이라고 본다.

가령,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것에 항거하기 위해 무리하게 신학에서 그 선동의 논리를 찾는 시도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선동의 지속성도 길지 못하고, 신학의 본질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로버트 웨버가 분류한 방식을 빌자면,
소위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여러가지로 구분이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들 ‘젊은 복음주의자’중에서 중요한 두가지 분류가 있다고 본다.

한 부류는 새롭게 맞닥드리는 세상의 조류를 신학적으로 설명해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동의 동기와 심지어는 방법까지도 정해놓고는 그 supporting argument를 신학적으로 찾아내려는 사람들이다.

어떤 부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사실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수 없으니…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깨닫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꽤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
(긍정적, 부정적 의미를 함께 포함한다)

인디에서 간사들 카톡 그룹에 내가 끼어 있는 바람에,
간사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들이 다 보인다.

그래서,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인디에 가 있다.
괜히 그 카톡 메시지들 보며 눈물도 핑~ 돌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성경공부를 할때,
깊이 기도에 빠질때,
열정적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때,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message를 할때,
깊은 예배의 현장에 있을때,

그럴때가 참 좋다.
내가 종교적이어서 그런걸까.
일상생활에서 맞닥들이고 경험하는 하나님보다, 그런 세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이 더 강렬하고 좋다.

그러나…
뭐 내가 꼭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수는 없으니…
심지어는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할때가 더 많으니…

인디 간사들 카톡 그룹에서,
한 자매가 첫날 함께 부르자고 보낸 찬양 악보를 보고,
그 노래를 며칠째 계속 흥얼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 이 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2불짜리 지폐

1.
지난 금요일,
직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 그룹은, 금요일이면 동네 싸구려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먹는 ‘전통’이 있다. ^^)

동네 허름한 인도 음식점에서 싸구려 인도 음식을 사먹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2불짜리를 하나 받았다.

2.
몇년 전,
코스타 집회에서 작은 봉투에 2불짜리 헌금을 한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내용이 이랬다)

저는 지난 몇년동안, 2불짜리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갑에 꼭 넣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집회에서 복음을 알고 나니, 그것이 이제는 가치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2불짜리를 지갑에 넣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헌금으로 드립니다.

나는, 꼭꼭 눌러쓴 그 메모를 몇번이나 읽으며 참 많이 감격했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가치를 보게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고,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지난 금요일에 받았던 2불짜리 지폐를 보면서 그때 그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인디의 집회 생각이 많이 났다.

3.
지금, 인디에서는 집회가 한참이다.
그렇게 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 것을 믿고 감사한다.
수고하는 우리 후배들 때문에 눈물나게 감사하다.

인디 화이팅!

인디에 부분적으로 참석을 좀 한 적이 있었으나,
작년에 처음으로 full 참석을 했었다.

그러면서,
여태까지 얼굴이 아른거리는 친구들도 있고…
구석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던 친구…
‘상담’을 마치고 나서도 내게 계속 text를 보내며 책 추천을 해달라고 조르던 친구…
진지한 얼굴로 신앙의 회의가 있다고 이야기하던 친구…
오랫동안 회의하다가 마침내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얼굴이 환해졌던 친구…
등등이 많이 생각난다.

금년에 또 다들 그렇게 오려나. 일년동안 다들 잘 살았나.

괜히 조장 훈련하는 website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 보기도 하고,
간사들이 무슨 얘기들을 하나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이제 내일부터 간사들이 인디에 모일테고,
오늘 밤 부터는 움직이기 시작할텐데…

모두들 화이팅!!
(특히, 여기 들어오는, 눈팅만 하는 인디 간사들 ^^)
I’ll be praying for you…

다행이다…?!

금년에는 인디와 시카고 양쪽 다 참석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나로선 많이 아쉽지만, 그리고 수고하는 후배들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괜히 가서 어쩡거리는게 도움이 많이 되기 보다는,
그저 ‘옛날’의 그림자를 계속 드리우게되는 부작용이 크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금년에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가치와 방향을 정비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마당에,
“옛날엔 이랬다”는 이야기만 자꾸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이제 금년으로,
별로 한일 없는 ‘공동대표’도 임기가 끝나므로,
이제는 그것도 좀 털어버리고,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만 살며 섬기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여러가지로 다시 따져보고 생각해 보았을때,
이렇게 금년에 많이 땡땡이를 치게된게…
다행인 것 같다. ^^

P 형이랑 또 만나서 놀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많이 외롭다.

지난 주일,
P 형이 SFO에 long layover가 있다면서 놀자고 나를 불러내었다.

5시에 픽업해서 9시 반 조금 넘어 공항에 데려다주기 까지,
저녁 먹고, 차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울컥 울컥 했다.
흥분하고 감격하기도 했고, 답답한 침울함에 잠기기도 했고, 감사하고 기쁘기도 했다.

사실 P 형이랑 나는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도 다르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게된 방식이나 신앙의 훈련을 받은 방식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게 당연히 있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형이랑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말이 잘 통한다.

신앙, 교회, 성숙, 가정, 자녀교육, 기도, 전도, 세상, 정치, 회심… 이런 저런 얘기를 닥치는대로 했다.

20년전 만나서 함께 많이 기도하고 울고 갈망하고 섬기고 했는데…
그렇게 3년 남짓 함께 지낸 후에는 계속 떨어져 지냈다.
제주와 미국은 정말 너무 멀다.
일년에 한번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 형이랑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잘 통한다.

형이 그랬다.
우리 처럼 이렇게 사는 것도 힘들고 외로운데,
김교신 선생 같은 분은 얼마나 외로우셨겠냐. 얼마나 힘드셨겠냐…

한국에서 나름 어렵게 구한 ‘허니버터칩’을 내게 건네주고는 공항 안쪽으로 형이 들어가버렸다.

지난 주일에..
둘이 서로… 많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잔뜩 했던 것 같은데… ㅎㅎ
형을 보내고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 통하는 사람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맞는 것이었다.

이제 이 형을 또 언제 보려나…
일년 이내에 한번 더 볼 수 있으려나… 싶지만,

그렇게 몇시간 P 형이랑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래도 이렇게 바보같이 예수 믿고 사는게 훨씬 덜 외롭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지혜에 대하여 (7)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혜는 결국 여러 단편적 지식들을 통합해 내는 틀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지혜를 갖추면, 지식 습득이 더 쉬워진다.

그런데, 단편적 지식의 통합은 결국,
그 모든 것을 엮어내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면 당연히 더 쉽다.

나는,
오랫동안 신실하게 신앙을 가져온,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노인에게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지적 능력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경험이나 배움의 기회의 차이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대학입학시험 커트라인을 정하듯이 지혜를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사람이 진리를 정말 깨달았다면,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가상의 상태와 비교해 보았을때,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진리에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것에 자신을 던져 사는 삶이 없이도,
진리에 대한 지식을 모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한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엔 히브리문학적 표현으로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거룩한 자를 아는 것) = (지혜의 근본 = 명철)
뭐 이런 도식인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것(Yada)는, 부부과 성관계를 하는 것과 같은 앎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호와를 아는 것이 결국 사람을 진리와, 지혜로 이끈다는 것이겠다.

나는,
지혜를 잃어버린 현대의 기독교가 안타깝다.

지혜에 대하여 (6) – 복음의 인격성이 가져다 주는 지혜

진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면, 진리가 ‘지식’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진리가 인격적이 되면, 진리가 ‘지혜’로 우리를 이끌게 되는 것 같다.

인격은, 다분히 다중적이다.
어떤이의 인격을 기술할때, 그것을 수학 공식이나, 도표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fact의 조합이 인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인격체와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관계가 깊으면 깊을 수록, 그 인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비인격적 진리는 그 대상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혹은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따라서 진리에 제대로 머물 수 없다.

진리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고 했을때,
그러므로 진심으로 지혜로워지려면,
그 진리이신 인격체와 관계를 맺을때만 가능하다.

어떤 종류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은 지식을 보지만, 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지혜를 보기 어려울때가 있다.
나는 그들이, 진리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기 보다, 비인격적 지식으로 대하는것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복음의 인격성을 간과했을때,
우리가 취득하는 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에 머무르고 만다.

지혜에 대하여 (5) – 리더들의 지혜 없음의 난감함

지혜란, 결국 integration이라고 생각한다.
integration이 잘 되어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나이가 40, 50… 심지어는 60, 70이 넘어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하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의 결정을 혼자서 하지 못한다거나,
충분히 handle할 수 있을만한 위기가 닥쳤을때 그것을 전혀 다루어낼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실 정말 많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적어도 내 관찰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integrate하려는 시도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받고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도 있다.
책도 많이 읽고, 책을 쓰기도 하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는 것을 통합하지 않아서 그 지식들이 job function을 할때는 유용할 수 있으나, 막상 자신의 인생을 운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리더들에게는 특히 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의 지도자가,
지혜가 부족한 것을 본적이 있는가.

정말 완전 난감해진다.

분명히 이 시점에서는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어서… (혹은 완전히 딴 소리를 하고 있어서…)
왜 그런지를 살펴보면 그 시점에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게 뭐 동네 조기축구회 같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큰 회사 조직에서도 이런게 발견된다. 완전 깜놀이다…

말하자면, 어떤 insight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리더의 지혜없음으로 인해, 그 조직원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야한다.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 profit, 사람관계, business transaction, 시장 forecast 등등에 대해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합’해 내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plan이 나와야한다.
그냥 여러가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라면,
복음의 본질, 세상, 사람, 성숙, 양육, 예배, 봉사, 선교, 훈련, communication 등등에 대한 단편적 지식 뿐 아니라, 그것들이 통합된 형태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수도 있고,
건강한 ‘vision’을 제시할수도 있다.
건강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심지어는 어떤 분야에 공부와 훈련과 경험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황에 맞닥드렸을때 거의 무기력에 가깝게 반응하는 것은 이런 통합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지 지혜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판별식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분야의 지식과, 다른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가령,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과 재정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회사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과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헤없는 리더들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