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기에,
신학은 일차적으로 설명의 도구이지 선동의 도구는 아니다.
(물론 적절한 설명과 해석의 결과로서 선동이 불가피하게 따라올수는 있겠지만 서두…)
신학이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 세상, 인간, 피조세계, 궁극적 실재등이고,
그러한 ‘개념’들이 context 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context를 그러한 개념들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도 그 내용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역사적으로 신학을 선동의 도구로 사용했던 시도들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콘스탄티즘, 중세의 교권주의 신학,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제국주의 신학 등등…
물론 그 경계가 대단히 모호한 경우도 많다.
가령, 남미의 해방신학은 설명의 도구였던가 선동의 도구였던가.
(설명을 하다보니 그것을 통해 어떤 논리가 나왔고, 그것이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이 선동의 도구로서 활용되면 그것은 일종의 slippery slope 이라고 본다.
가령,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것에 항거하기 위해 무리하게 신학에서 그 선동의 논리를 찾는 시도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선동의 지속성도 길지 못하고, 신학의 본질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로버트 웨버가 분류한 방식을 빌자면,
소위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여러가지로 구분이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들 ‘젊은 복음주의자’중에서 중요한 두가지 분류가 있다고 본다.
한 부류는 새롭게 맞닥드리는 세상의 조류를 신학적으로 설명해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동의 동기와 심지어는 방법까지도 정해놓고는 그 supporting argument를 신학적으로 찾아내려는 사람들이다.
어떤 부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사실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