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론과 신앙

나는, 한국에서 소위 87년 민주화를 목도한 세대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때였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60년대 후반으로부터 내가 한국을 떠난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경이로운 사회발전과 경제성장을 이루었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나를 둘러싼 상황이 가지고 있었던 낙관론은 내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이제 2010년대 중반에 이르는 지는 20년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상황 모두, 낙관론을 가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체제가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한국도 미국도 정말 동의하기 어려운 정권들이 ‘악한’ 결정을 내리는 일들이 있었고,
전 세계가 테러의 공포 속에 있으면서 계속된 전쟁 속에 있고,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도,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20대의 푸른 꿈을 꾸던 시대와,
이제는 꿈이 많이 제한된 40대를 살고 있는 시대가 다르기도 하겠고.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 정의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듯 하고,
약자가 착취당하는 것이 개선될 소망 없이 반복되고 있고,
나와 주변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문제로 신음하고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조롱당하고 있고…
이런 상황이 익숙해질만도 한데
그렇게 ‘잘 안풀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익숙해질만도 한데,

여전히 낙관적 시대에 살았던 버릇이 남아서 일까…
세상과 나와 주변을 보며 자꾸만 분노하고 탄식한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이 분노와 탄식에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그저 생각없이 내 몸에 익은 낙관론이고,
어디까지가 깊은 신앙적 사색을 거친 낙관론인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어야 하는 것 같다.

벌써 한 10년쯤 전에 이런 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due가 지난 숙제를 하는 것과 같이…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며칠전,
인터넷에서 기독교는 예수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라는 글이 돌았다.
그런데, 그 글에 달린 비판적인 답글들을 보면서…
아…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답글을 다는 사람들은 마틴 로이드-존스가 이야기한 그 의미를 알기는 하는 걸까.

예수를 본받지 않고 믿기만 하니까 삶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이라는 식의 악플들을 보면서…
참 공부하지 않고 악플다는 사람들은 답이 없다는 생각이 한편 들면서도…

소위 ‘보수신앙/보수신학’이… 성공주의/물질주의/이원론 등등에 정복당하는 바람에,
제대로된 보수신앙/보수신학을 이야기할 ground 조차도 사라져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가 예수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틴 로이드-존스가 이야기한 그 말을, 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깊이 대화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더 배우고 싶다.

예수를 본받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이 결여된 따름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3)

1.
일본의 실업률이 대충 3~4% 수준이라고 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수준 아닌가?
그렇지만,
일본의 청년 실업률은, 거의 10% 수준이라고 들었다.
수치상으로는 한국의 청년실업률과 비슷한 수준이거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청년 실업률은 그렇게 높지 않다.

한국은 소위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이거니와,
그나마 소위 비정규직 저임금의 ‘알바를 뛰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노력하면 그럭저럭 일자리는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일본인들과 좀 다른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일까?

2.
일본은 아직도 ‘평생직장’의 개념이 있다.
우리 회사도 일본에 몇개의 business group이 있는데, 거기 사람들은 절대로 안짤린단다. -.-;
그리고, 정말 회사를 위해서 아주 열심히 일한다. (곁에서 보기에 불쌍해 보일정도로…) 대신 회사는, 짜르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가고,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의 연금도 은퇴 후에 제공해준다. (그 연금만으로 살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그래도 한국 보다는 훨씬 더 상황이 좋은 것 같았다.)

미국식의 무한경쟁…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져야한다는 개인주의적인 접근,
일본식의 평생직장… 어쨌든 함께간다…는 식의 접근.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오히려 직장인들이 더 힘든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3.
일본의 회사 체계는, 대단히 rigid 하다.
말하자면 유두리가 없다.
무슨 결정을 하나 하려고 해도, 기존에 해오던 방식이 아니면 뭔가를 해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대신, 한번 setup이 되면, 지루할정도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을 한다.
사실 제조업에서는, 이런 consistency가 대단히 중요하다.
agile 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consistent 한 것이 제조업에서 강점이 되는 것이다. (이건 독일도 비슷하다.)

반면,
한국이나 미국은 일본보다 훨씬 더 agile 하다.
미국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율권이 커서 agile 한 반면,
한국은, 일이 되게하기 위해서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여서 agile 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agile한 manufacturing을 갖고 있는 전 세계에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닌가싶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 자체가 DNA로 가져야하는 ‘진득함’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내가 보기에,
중국은 일본보다는 한국의 모델을 따라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제조업의 등장은, 일본보다는 한국에게 더 큰 위협이 아닌가 싶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2)

일본에서 만나는 엔지니어들은, 그 수준이 상당하다.
내가 주로 상대하는 회사는, 일본의 중소기업들이다.
크게는 직원 몇천명 수준의 회사로부터 작게는 직원 수십명 수준의 회사들이다.
이렇게 출장을 가면, 그 회사의 CEO로부터 말단 엔지니어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Business transaction을 담당하는 사람, 기술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 기술쪽 매니저, 행정비서, 특허나 법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 logistics 담당, 회사의 executives…

그런데,
그런 작은 회사들을 보면,
정말 detail을 자세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단 엔지니어로서 있다.

반면,
한국이나 미국, 혹은 중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가령 한국에서는 대기업에 이런 사람들이 좀 있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에서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일본과 비슷하게, 아주 실력이 탄탄한 말단 엔지니어들을 만날 수 있는 나라는 독일이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대학도 나오지 않은, 직업학교 출신의 엔지니어이지만, 그 분야에 깊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비교적 제한적이므로,
얼마나 일반화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랫동안 제조업을 해온 나라가 갖는 탄탄한 저력이자 기반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런 고수 말단 엔지니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런 사람들과 박사들의 pay 차이가 미국같은 나라보다는 훨씬 적어서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게 정말 사실인지는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에서, 말단 엔지니어와 높은 상사가 함께 business trip을 할 경우,
말단 엔지니어는 비지니스 클래스를 태우고, 높은 상사는 이코노미를 탄다고.
왜냐하면 현지에 가서 실제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단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다음에 언제 이것도 한번 물어봐야 겠다. ㅎㅎ)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미국은 한때 탄탄했던 제조업의 기반이 붕괴된 상태인 것 같고,
한국은 아직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기업이나 사회의 system으로 보아, 한국이 이런 수준까지 도달하게 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의문이 있기도 하다.

출장에서 배운 것들 (1)

나는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이다.
이게 개인적으로 꽤 힘들기도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러나라에 출장을 다니면서 여러가지를 참 많이 배운다.
지금껏 내가 주로 business를 하면서 다루어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현지 방문: 일본, 독일, 한국 & 미국(^^)
현지 사람들과 많이 만나서 이야기함 : 중국, 대만, 일본, 한국, 홍콩
출신 이민자들과 많이 일함: 인도, 중국, 대만, 한국
제한적으로 만나서 일함 : 태국, 멕시코, 영국, 러시아

이 사람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여러가지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참 많이 있다.

뭐 내가 대단히 깊은 다문화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여기에 정리해볼 수 있는 것이 대단히 제한적인 것일테고,
뭔가 종합적인 insight라기 보다는 단편적인 생각들일테지만,
한번 출장을 다녀올때마다 정리해볼 수 있는 생각들을 한번 출장때마다 2-3개씩 적어보려고 한다.

우선,
내가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배우게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일본은 이런 나라다, 중국은 이런 나라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매우 많이 들었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들 가운데 맞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롭게 배우게되는 것도 많고,
어설프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깨지는 경우도 많다.

구 동독 지역에 살고 있는, 50대의 구 동독인이 돌이켜보는 독일 통일,
역시 구 동덕 지역에 살고 있는, 통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생각하는 통일에 대해 들으면서,
깨달은 것들이 있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는 일본인 엔지니어와 밤 늦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과 가족, 직업과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게되는 일이 참 좋았었다.

중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천안문 사태를 대학생때 경험한 엔지니어가 홍콩에서 일하면서 하는 고민을 들으며, 문화와 역사와 신앙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정복주의적인 혹은 제국주의적인 문화적/신앙적 접근을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은 진리이고, 너는 다 틀렸다는 식으로 이들에게 윽박지를수 없다.
오히려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내 신앙이 얼마나 좁은 문화적 바운더리에 갖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주로 그들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그들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매우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존경심을,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한편으로는 연민을, 한편으로는 동료애를, 한편으로는 이질감을 느끼지만…

이런 대화들은, 나를 많이 겸손하게 한다.

[2003년? ] 텔레토비는 사탄적인가?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문화 속에서 뉴에이지, 혹은 사탄 문화의 성분을 구별해 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때 저도 우리가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이 얼마나 사탄적인가에 관하여 여기 저기에 기고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열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도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우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직은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이 “already but not yet” 선포된 이 세계에서 문화는 어찌되었건 ‘사탄적’인 것에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전체를 싸잡아서 ‘사탄적’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가령 아무 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음악, 미술작품 어떤 것이든지 뽑아 그 안의 ‘사탄적인’ 것들을 찾아내자고 해서 잘 ‘짜내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또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사탄적인 것을 찾아내라고 해 봅시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사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낮은울타리 식의 연구와 분석이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뉴에이지고 식의 몰아세우기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를 분리시켜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문화속에 숨겨져 있는 잘못된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에 (정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식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디에서 한마디 들은 것으로만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듭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레토비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더 많이 있다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텔레토비 자체를 ‘사탄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수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수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를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텔레토비로부터, 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성경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라고 해도 역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점이라던가.)

우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되고, 청각장애인이 듣게되는… powerful한 복음입니다. 왜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악마적이라며 피해야만 합니까? 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더 성경적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살고있는 미국 보스턴 근교에는 Salem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초기에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 ‘영적 순결함’을 찾고자 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마녀 박물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Haloween이 되면 각종 마녀 관련 행사들이 치루어지는 ‘마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문화를 마녀로 몰아세울때, 문화는 영영 사탄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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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썼는지 어디에다 썼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cyworld 에 썼던 것 같기도 하고…

[2000년?] 다른사람으로 부터 주목받으려는 거지 – 바로 우리의 모습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에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를 손을 붇들어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가 지난번에 성경공부시간에 보았던 것 처럼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이야기를 하니 성전 미문의 거지가 일어나 걷게 된 장면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성전을 늘 들고 나오다 보면,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장소에 앉아 있는 이 거지를 사람들은 보면서 이 사람을 향해서, ‘아 불쌍하다’ ‘참 안됐다’ 하는 반응으로부터 자기 자녀에게 허리를 구부려 귓숙말로, ‘너도 죄 지으면 저렇게 돼’ 라고 타이르는 반응, 혹은 그냥 피하는 반응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이 사람은 이미 꽤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장애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이 거지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어떤 피해야할 예로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걷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냥 걸었던 것이 아니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신기한 일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지는 알수 없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파라다임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사람이 죄의 문제가 해결 되어야 이런 일이 일어 나는 것일테고,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건데…
아니… 무슨 선지자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claim하는 사람들도 아닌 두사람의 어부가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 났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주목했겠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집중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아니 질색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그랬을까. 아니 그냥 일단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고 그런데 이런 내가 사실은 예수의 제자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 했더라면 어떤 의미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거 참 많이 우리가 생각하는 거지요. 나중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서 노벨상을 받는 자리에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얼마나 멋있겠느냐.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많이 듣고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아주 질겁을 합니다. 아이고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예수가 꽉 차 있었’던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과 말과 행동의 모든 목표가 예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삶을 따라서 사는 데에 집중 되어 있는데, 갑자기 자신이 높아지게 되니 도무지 어떻게 이것을 참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절절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내가 주목받다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에 심각한 장애가 있겠다는 생각에 아주 질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의 이름이 높여지고 우리가 주목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해 합니까? 퀄리 파잉 시험은 내가 잘 보려나, 결혼은 잘 할 수 있으려나, 다음주 시험은, 직장은, 논문 쓰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내게 attention을 주려 하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아주 desperately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해 아둥 바둥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살 속에서 그것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롭겠습니까?
그대신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 삶의 영역에서 나를 ‘높이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맞게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은 그저 그분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도록만 하면 됩니다. 괜히 내가 그 앞에서 치장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천박하게 가릴 뿐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서 이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코스타에 거의 반쯤 미치다 시피 해서 살고 있는 건 아시는 분들은 아시죠.
H 간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3년 전까지 간사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총무간사를 하신 분이시고 제가 보기엔 코스타 스피릿을 건강하게 지켜내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분은 서울대에서 물리공부하시고, Michigan에서 박사하고 지금은 NIST라고 미국
표준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계신 분입니다. Nano-biotech 분야에서 꽤 알아주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연구 결과도 주목을 많이 받는 분이시고.
그런데, 전 이분의 background를 잘 알기 전에는, 그냥 별로 똑똑하지 않은 분인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대화 중에 이 분이 똑똑하다는 것이 별로 안드러납니다. 한 1년 동역을 하면서 이분을 가까이 보니 그제서야 아… 내가 생각했던 것 처럼 별 생각 없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내다 보니 이분의 background도 알게 되었고, 이분이 여러 방면에서 섬기시는 모습들도 알게 되었고… 뭐랄까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더군요. 그런데 그냥 이분하고 그냥 얘기를 해서는 이분이 하나도 안드러나는 겁니다.
이분이 총무간사를 하실 때 우리 코스타 간사들에게 하셨던 이야기 하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간사들이 하는 사역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코스타에 참석한 지 10년쯤 지난 후에 “내가 그때 그 코스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며칠씩 잠도 못자고 우리들을 섬기느라 초췌해 보였던 어떤 간사 한 사람이 내게 그때 밤 늦게까지 복음을 참 잘 소개해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복음을 설명 들을 때 내 마음 속에서 넘쳐났던 감격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생생하지만 그 복음의 감격이 너무나 커서… 정작 그 복음을 내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던 그 간사는 이름도 얼굴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하나도 생각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Man, I really wanna be like him! 정말 내가 하는 사역들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

우리 민우는요, 때로 정말 멋진 그림을 그리고 나선 엄마 아빠에게 쪼르륵 그 그림을 들고 옵니다. 엄마 아빠가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면서 한번 안아주길 바라면서요. 글쎄요 그 칭찬이라는게… 잘했다고 말하면서 한번 꼭 안아주는 거지만 민우는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민우는 엄마 아빠를 몹시 사랑하거든요. 엄마 아빠의 주목을 받는 것이 그 무엇에도 우선하거든요.

언젠가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충만히 회복되는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꼭 안아주시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다른 누구의 인정보다 내 인정을 더 갈망하는 네 마음 내가 안다 하시는 거 모습을 정말 저는 매일 꿈꿉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을 베드로와 요한 되게 했고, 그들이 전한 예수님을 참으로 예수되게 했고,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참으로 우리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싸구려 거지 가치관에 의해 휩쓸리지 않는

===
format을 보아하니, 짧은 설교문인듯 한데,
언제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대충… 2000년대 초반,(31~2세 전후) 언제 하지 않았나 싶은데.

[2001년] 귀족 크리스천

인간의 사회는 어느 곳이 건 ‘계층’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부정적이지 않은 부류의 계층도 있으나 그 계층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 혹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성경은 이러한 계층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마서 13:1) 적극적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베소서 2:14)
계층은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계층은 교회의 건전한 성숙을 이루는 좋은 프레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에서 특정 ‘계층’을 이룬 사람들이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큰 제약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들은 ‘귀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은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거나 종교 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어서 예배의 한 순서가 끝나면 그 다음 순서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신앙의 ‘레벨’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의 감격에 의지해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종교적 행위, 교회 봉사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그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때의 멸시는 물론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건덕(健德: 덕을 세움)을 중요시하는 교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담는다.) (마가복음 7:6-23)

이들은 또한 대부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가르치려 한다. 10여명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에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삶의 구체적 고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마치 유일한 성경적 정답인양 30분씩 충고를 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대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건에서 겪은 일들이나 인상 깊은 설교로부터 가르칠 거리들을 잘 준비해 놓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나 고민을 겪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저 한 사례(case)로 입력되어 자동적으로 해답을 출력한다.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떠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종교적 원론을 남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디모데전서 1:5-7)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번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모든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하는 것을 신앙의 절개로 여기고 흡족해 한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동역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들이 리더가 되지 않는 한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율법적 혹은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거부한다. (에베소서 4:1-3)

이들은 매우 사역 중심적이다. 지역 교회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들은 탄탄한 종교행위의 이력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들과 인력을 동원해 사역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 한 영혼의 구원과 양육, 성장, 치유 등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은 집단적 성장을 위한 계획, 전략, 추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추종자’만이 요구될 뿐이다. 때로 자신이 거의 혼자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역 계획을 수립해 놓고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취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일꾼’을 찾는 많은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에게 인정을 받기 마련이고 소속된 신앙 공동체에서 단기간 내에 요직을 차지한다. (누가복음 10:38-42)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대개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성공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 이처럼 좋은 배경은 자신의 신앙적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은 당사자의 잘못쯤으로 여기고 정죄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이들에게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들에겐 그저 성공을 향한 전진이 최상의 목표이다.

귀족 크리스천, 그저 이름만으로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단어가 한 절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러한 귀족 크리스천은 흔히 발견된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캠퍼스 모임 리더들 사이에서 어쩌면 귀족 크리스천은 더 강한 연대를 가지고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쩌면 ‘특권 계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귀족 크리스천은 더욱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털어내시며 우리를 섬기시지 않았는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으시며 왕이 종으로 섬기시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지 않았는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분은 이제 너희가 나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으라고 우리를 보내고 계시지 않은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KOSTA/USA-2001은 그래서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으로 느껴진다. 금년 코스타가 유난히 더 기대된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1년] 자격시험(Qualifying Exam)에 실패한 후배에게

사랑하는 성철아,

지난 박사과정 자격시험에서 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매우 성실한 사람이고 또 열심히 준비했으므로 별 문제 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불합격소식은 내게도 무척 충격적인 것이었다.

글쎄, 내 짧은 편지가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너의 이번 실패를 두고 생각하는 것들을 좀 나누어 볼게.

나도 미국에 ‘푸른 꿈’을 가지고 와서 (요즈음엔 이걸 비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정말 열심히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비교적 적응도 잘 되어가는 듯 했고 수업도 그럭 저럭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별 문제가 없으면 사오년 안에 학위를 따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내게 문제가 생겼다.
입학한 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 어렵게 찾은 지도교수가 갑자기 재정지원을 끊은 것이었어.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열심히 일하며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몸부림치던 내게 그건 큰 충격이었어. 갑자기 지도교수를 잃어버린 나는 원래 보게 되어있었던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석사과정 학생으로 ‘강등’이 되었지. 한 학기에 만불이 넘는 학비를 자비로 충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고, 내가 다시 석사를 끝내고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을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삼년 이상 늦어질텐데, 이럴 바엔 짐을 싸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도 심각하게 기도했었어. 어느 아침에는 일어나서 ‘그래, 오늘은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한국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하자’고 결심했다가도, 그날 저녁엔 다른 학교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전학(transfer)용 원서들을 다운로드 받았고 자기 전엔 ‘내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며 잠자리에 누웠지.

게다가 그땐 내가 청년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던 때였고 그때 막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청년부를 돌보는 데에도 많은 힘을 쏟고 있을 때였어. 정말 아침엔 청년부 한 지체 한 지체를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가곤 했던 때였지. 어떻게 하면 새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경공부 모임들을 잘 세워나갈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하였고.

나는 하나님께 아주 절실하게 여쭈었어.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거냐고. 게다가 나는 유학생들과 복음을 나누고 복음으로 양육하는 중요한 일을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특별히 학문적인 능력이 현저히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괜히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어떤 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교회의 한 골방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고, 어떤 땐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아보자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어떤 땐 그저 앉아서 구름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중학교때 몰래 다른 아이 일기장 훔쳐 본 것까지 생각해 내며 ‘회개’를 하고 이젠 좀 풀어달라고 기도해보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

그런데 답답한 마음 중에 나는 출애굽기를 묵상했었어. 사십년 간 광야를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말이야. 워낙 잘 아는 이야기들이고 그저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해 보였던 출애굽기가 내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 정말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한 이야기로. 사십년 간 돌고 돌고 또 돌면서, 어떤 때엔 구름기둥/불기둥이 며칠씩, 몇달씩 움직이지 않았던 때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면 백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구름기둥이 움직일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나 하며 천막 밖으로 목을 빼곤 했겠지.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해 하면서도 그저 그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그래도 눈물을 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겠지.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이러한 깨달음은 그저 ‘시뮬레이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몸으로 부딪히고 온 삶으로 겪어야만 내 것으로 체득되는 것이니까.

오늘도 나보다 이년 더 늦게 우리 과에 들어온 어떤 사람이 마지막 박사논문발표(final defense)를 한다는 이메일을 받았어. 이런 이메일을 받는 박사 6년차의 기분이 어떤지 넌 아니? 그래, 나는 아직도 그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던져놓으신 ‘돌맹이’로 인한 파장을 다 수습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허덕이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장학생(長學生; 오래 공부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께서 왜 그때 그렇게 하셨는지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어. 물론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공부를 향한 나의 인간적 욕심을 다루시기 위해 등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 볼 순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성철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모든 ‘고난’과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난 유학오길 잘했다는 거야. 젊은 시절에 경험하는 이 ‘광야생활’이, 비록 나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할 지라도, 내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더 절실히 의지할 수 있는 멋진 영적여정(Spritual Journey)임을 알기 때문이지. 지금 내 은행계좌엔 584불이 남아 있어. 앞으로 한달 동안 나와 내 아내와 우리 두살난 딸이 함께 살아야 하는 돈이지. 학문적, 경제적 압박들이 늘 나를 짓누르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또 다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내 삶 속에 흐르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만 있다면 한번 해 볼만 한 일 아니니?

성철아,
이번의 실패로 마음이 답답하면 울어. 먼 산을 쳐다보며 멍하게 있어도 보고. 나도 어떻게 어려움과 아픔들을 견뎌야 하는지 잘 몰라. 그냥 나도 그렇게 울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멍하게 있곤 하거든. 그래도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 아니니.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바보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어 돌아가셨잖니. 그 예수님의 사랑에 한발 더 깊이 빠져보자. 그것 외엔 길이 없으니까.

언제 전화 한번 해라. 내가 네 푸념 들어주면서 네가 좋아하는 육개장 오랜만에 한국음식점 가서 사줄게.

2001년 4월,
주안에서 함께 형제된, 경호형이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999년] 주일 예배 기도문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 이름을 알지 않고서는 도무지 누릴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도 그저 저희에게 벅찬 감격이 됨을 고백합니다. 도무지 저희에게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인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일년간 저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먹이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은 단 한끼의 식사도 먹을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저희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저희를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이나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외모보다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는 것을 저희로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모였을 때 보다 흩어졌을 때 더 powerful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중 장부를 만드는 일을 그치고, 부정한 방법으로 학교 성적을 올리는 일을 멈추고, 뇌물 주고받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하나님의 법이 흐르는 세상만드는 그런 공동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이야기하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조금만 더 참아주시옵소서, 저희가, 우리 젊은이들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과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의 소망이 되는 때가 올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잠시만이라도 이 교회를 거쳐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누었던 많은 사랑과 vision으로 가슴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누리고 쓰는 것 보다 다른이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교회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형제들이 굶고 있는데, 그저 무슨 밥그릇에 밥먹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교회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한번만 듣기만 하면 주님앞으로 돌아와 영광스러운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외침, 단 한 덩어리의 빵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눈물, 전쟁의 포성 속에서 지하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있는 어린이의 공포에 싸인 눈,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아픔을 보시며 가슴아파아시는데 저희는 그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반찬에 밥먹을까만을 고민하는 그런 싸구려 인생들되지 않게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번주에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나 하는 것보다 우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주에 헌금이 얼마 들어왔나를 세는 것보다 어느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가를 찾을줄 아는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보시옵소서. 죄를 죄라고 외칠 때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땅을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돈, sex, 권력, 쾌락의 우상들을 보시옵소서. 오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필요로합니다.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지금도 지옥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가득한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을 보내주시옵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땅에 가득하게 될 부흥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로 하여금 그 부흥의 도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특별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사람들에게 바로 이 자리가 당신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거나, 직분을 가졌거나, 배경이 어떻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의 주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사람의 말솜씨와 기술로는 불가능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 마음에 닿으면 바로 그가 예수님 영접할 수 있게 될 줄 아오니 이 자리가 그런 영광스럽고 기쁜 자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 그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내 몸을 찢었노라고, 너의 삶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노라고 하나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서 있다가 침체에 빠진 사람들, 열정을 잃은 사람들, 더 이상 싸울 힘도 사랑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 다시한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일어서 주의 용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어 기도하는 용사들로 다시 세워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는 어떤것도 하나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자폐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희에게 기쁨도 감격도 진리를 깨달음도 행함도 아무것도 있을 수 없사오니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희로 주의 자녀들 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바로 이 시간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테크닉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지고, 저희가 그 죄의 무게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던지는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축하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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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99년 12월 어느 주일 예배시간에 드렸던 기도였다.
이때 ‘집사’였는데, 2000년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집사로서 교회에서 성실하게 섬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교회에 말씀드리고, 집사에서 ‘은퇴'(?) 했었다. ㅎㅎ
어쨌든 그 이후 교회 주일 예배시간에 내가 기도를 인도하는 일은 없었다. ^^

지금은 이때 했던 기도의 내용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이때 예배시간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함께 많이 울었던 학생들 생각이 많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