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평형

0.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분명 창조주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 하늘, 물, 공기, 동식물 등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와 같은 물리 법칙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Avogadro’s number를 6.02×10^23으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 이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천지 창조의 첫 tape를 끊으시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우주에 광자(photon)을 만드셨고, 양자역학적으로만 설명이 되는 빛의 이중성을 빛에게 부여하셨으며 빛의 속도를 2.997924590×10^8 m/sec으로 정의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 우주에 설정시키셨고, 이땅에 동식물을 종류대로 지으신 그 순간부터 유전인자인 DNA의 구조는 이중 나선 구조로 결정되었다.
평형이란 어떠한 system의 가장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자연계는 이 평형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여러 자연 과학의 법칙이 그렇듯이 평형 상태를 맨 처음 정의하시고 사용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1. 완벽한 평형 – 하나님의 창조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분명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걸작품이었다. 완벽한 법칙들이 우주를 지탱하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만일 중력 상수(G)의 값이 6.67×10^-11 m^3/s^2․kg에서 조금만 벗어났어도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가 달라져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덥거나 추웠을 것이고 우리 사람들을 비록한 여러 피조물들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최초로 설정시켜 놓으신 평형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형 상태는 완전한 평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완전한 평형의 일부로서 그 평형 가운데서 평안하고 즐겁고 아름다왔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그러한 평형을 깨뜨렸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평형 상태로 부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뛰쳐나온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고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평형 상태가 아닌,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고갈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천재 지변등을 통해 보복하는 비평형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질병과 아픔과 고난이 있고, 전쟁과 시기와 질투가 있게 되었다.

2. 활성화 에너지(Activation Energy) – 예수 그리스도
A라는 물질과 B라는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서 AB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spontaneous) 반응이라면 물질 A와 B는 화합물 AB를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 평형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형 상태가 반드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물질이 화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에는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활성화 에너지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이다.
가령 예를 들어 유리를 보자. 유리는 비정질(amorphous)라고 불리우는 비평형 상태의 물질이다. 모든 물질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결정 구조가 있는데 우리가 보는 유리는 SiO2와 그밖에 약간의 불순물들이 그러한 결정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엉겨붙어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유리를 가만히 놓아둔다고 해서 쉽게 결정화(crystallization)하여 고유한 결정 구조를 가지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열을 가함으로써 분자 구조가 재배치되는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죄로 인한 피조 세계의 비평형 상태는 피조 세계 스스로 극복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리가 스스로 활성화 에너지를 제공하여 결정화 할 수 없듯이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 스스로는 최초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아름다운 그 피조 세계로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는 활성화 에너지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활성화 에너지의 제공원이 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혼돈과 갈등으로 가득한 피조 세계에 내려 오셔서 피조 세계의 회복을 직접 이루어 가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활성화 에너지 – 그것만이 전 피조 세계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전 세계의 회복은 이미 선포되었고 시작되었다. 건초 더미에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한 것처럼 이러한 전면적 회복은 대세이다.

3. 우리 안에서의 평형
다행히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활성화 에너지를 받은 우리들 안에서는 평형상(平衡相 : equilibrium phase)으로의 회복 반응이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그 반응의 불꽃이 거의 매우 미약하여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이 어떤 ‘맛’이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느껴본 사람들이다. 엄청난 평안, 기쁨, 안정감…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리고 전 피조 세계가 바로 그러한 평형 상태를 기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부터도 이 비슷한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평형상의 흉내를 낸 것일 뿐이다. 마치 유리가 평형 결정상의 흉내를 내고 있는것 처럼.
이제 평형 상태로의 회복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회복은 예정된 완성이다. 회복은 대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가 결정화된 평형 상태에 있다고 믿고 있는 비평형상들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활성화 에너지를 전해줄 매개체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 상태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 몸을 태워 예수 그리스도라는 활성화 에너지의 불길을 전하는 일들을 하자. 우리 주위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경험한 평형 상태를, 그 엄청난 평안을 소개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성화 에너지, 회개라는 격렬한 반응, 그리고 구원및 회복의 완전한 평형. – 그래, 바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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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94년경(25세)에 쓴 글.
완전히 geeky한 글인데…
나는 내가 깨달아가고 있는 복음의 비밀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던 과학/공학적 개념의 언어로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

[1994년] 하늘나라 놀라운 곳?

– 여섯살 때, 동생과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고는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어도 혼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여자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갖었다. 그리곤, 하늘 나라란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해주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엄청나게 많이 맞고, 학교를 하루 결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잘못을 해도 체벌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주위의 불량 학생들에게 내 돈을 빼앗겨 보았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가 만일 있다면, 그 나라엔 그 누구도 내 돈을 빼앗아 가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맡았었는데, 학급의 잘못에 대한 벌은 항상 반장이 대표로 받았다. 나는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내가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과학 고등학교라는 낮선 환경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중학교 때 까진 스스로 상당히 잘났다고 생각했던 내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나는 하늘 나라란 누구나 다 공부를 잘할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입시라는 부담감을 남들보다 1년 일찍 겪으면서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입시 지옥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6월 민중 항쟁이 일어나고, 온 사회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불의와 정의, 독재와 민주, 독점과 분배. 최초로 사회 정의라는 것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만일, 정말 만일 하늘 나라라는 것이 있다면 그 나라엔 민중이 독재자를 쳐부수는 나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난 내게 진실한 친구가 없음을 보았다. 모두가 내게는 피상적인 친구들이었다. 난 절대로 내 마음을 그들에게 열어주지 않았고, 그들도 역시 그랬다. 난, 하늘 나라란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고 나를 포용해주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난 처절한만치 내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갔다. 남들이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내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잘 꾸민 가면만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내 속 사람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다. 별로 그럴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내 속 사람을 그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난 어떤 빛을 보았다! 아직 어렴풋하고 희미하긴 하지만 그 빛은 나에게 하늘 나라의 형상을 조금씩 보여주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기대하던 하늘 나라의 모습과는 다른 더 큰 무언가가… 난 내 일생에 있어서 최초로 내 마음의 문을 그 빛을 향해 열었다.

–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엄청난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열려진 그 비밀은 내 어둡고 좁은 가슴에 하늘 나라를 옮겨다 주었다. 이제 하늘 나라는 내 안에 와버리고 말았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큰, 그러나 조용하고 점잖은 모습이었다.

– 그 이후… 아직 내가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하늘 나라의 모습을 하나 둘 씩 더 알아가면서, 내 삶의 driving force는 이제 그 엄청난 하늘 나라의 비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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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이면 25살.
내가 나름대로 ‘회심’을 경험한 것이 90년이었다.
그러니, 이때쯤에는 내가 경험한 회심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

또 다시 출장

오늘 또,
아시아쪽 출장을 떠납니다.

사실 지난 몇주 계속해서 출장을 가야하는 일들이 쌓여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교묘하게(?) 출장을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전 정말 출장을 한번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서, 또 한번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열흘 남짓 가야할 것 같은데,
출장 기간동안, 제대로 글을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그동안은 예전에 썼던 글들 가운데 몇개를 올려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지금 보니,
이 블로그에 쌓여있는 글이 1700여개가 되더군요.
예전 글들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을 올려서,
저도 생각을 다시한번 가다듬어보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

내가 많이 비정치화 되긴 했지만…

나는 뭐 내가 정치에 개인적으로 뜻을 둔다거나 그래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내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도 않다.

어려서부터 그저 ‘모범생’으로 자라오면서,
“저렇게 데모하면 인생망친다…” 는 식의 가르침을 계속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듣고 자랐고,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복음을 깨닫고 나서,
내가 사회정의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정치를 통한 사회정의의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정의가 과연 그렇게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게 되었고,
대충 3-4년 전부터는 내가 많이 비정치화 되었다.
여전히 내 나름대로 선호하는 정치적 그룹이 있고, 내 나름대로 꽤 분명한 정치적 선호가 있지만,
그것에, 예전만큼 목매는 자세는 갖지 않게 되었다.

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병박이나 박근혜같은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때도,
그렇게 많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지금 이 정권은 잘못되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잘못된 일’을 할 때에는,
의도가 악해서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반복해서,
그래… 이 사람들은 그냥 무능력한 것이지 그렇게 악한 것은 아닐지도 몰라…
뭐 그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물론 무능한 점도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의도 자체도 악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정치에 그렇게 큰 소망을 두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물속에 수장된지 일년이 되었다.

이 마음 속의 분노를 어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망치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지난 주말에 잠시 생각해본 것.

어떤 크지않은 조직이나 공동체가 있다고 하자.
그 조직이 잘되는 모습을 가지려하면, 대단히 많은 조건이 맞아야한다.
좋은 리더, 명확한 비전, 건강한 조직문화, 좋은 조직원 등등.
그래서 big hit을 하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쉽지도 않고, 흔히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어떤 조직에, 정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그 사람(들) 때문에 성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조직에, 정말 아주 훌륭한 사람 (인격, 실력 등 다방면에서)이 아주 소수의 사람이 있다면,
조직은 그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실패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가령,
크지 않은 지역교회를 생각해보자.

작은 그룹의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쁜 소문을 돌리고, 서로 사람들을 이간질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 그룹의 사람들이 대단히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 때문에 전체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러나,
또 아주 작은 그룹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그냥 어떤 한 사람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단점을 덮어주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그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파괴적으로 깨지는… 완전히 망가지는 사태를 피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일반화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적당한 size의 공동체, 조직 등에 어느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unsong hero를 쓰시는걸까?

아브라함, 모세, 다윗, 느헤미야, 이사야, 세례요한, 바울, 베드로…
이런 엄청 드러나는 리더들의 존재가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드러나는 리더가 아닌, unsong hero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일을 지탱해내시기도 하는것이 아닐까.

앞에서 드러나는 리더가 고함을 쳐가며 어떤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요긴하게 쓰시는, 드러나지 않은 한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드러나있는 리더가 없어져도… 되던 일은 될 수 있는데,
그 드러나지 않던 숨은 일꾼, 그 한 사람이 없어지면… 순식간에 스르륵… 전체가 무너져버리는.

성경에서 그런 예를 찾기가 쉽지 않고,
역사속에서 그런 예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드러나지 않으니….)

그런데,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
그런 예들이 있었다.

정작 어떤 모임이나 흐름이나 운동이나 단체나 조직의 참된 생명력이,
드러나있는 리더로부터 나오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

예전에는 정말 멋진 리더가 되고 싶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숨은 일꾼이 되고 싶음 마음이 커진다.
하나님 이외에는, 내 땀과 눈물과 수고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민우와의 대화

벌써 좀 된 이야기인데,
민우와 몇가지 이슈에 대해서 ‘토론’을 했었다.

첫번째는 성경과 진화론에 대해서.
이 이슈에 대해 민우의 입장은 꽤 단호하다.
성경이 진화론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거부할 근거가 성경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두번째는 동성애에 대해서.
이것도 민우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사실 민우 친구중에도 transgender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는 것 같다.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부분은 그 당시 문화에 한정시켜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슈에 대해서, 성경해석의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민우는 좀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되는대로 좀 더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

세번째는 마리화나 합법화에 대해서,
민우는 이것도 합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민우 말에 따르면, 민우 학년 아이들중에서도, 술이나 담배를 피는 아이들보다 마리화나를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한다.
워낙 많아서 사실상 이걸 현재대로 불법이라고 규정해도 도저히 control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그럴 바예는 차라리 합법화해서, 좀더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게 민우의 생각이다.
그리고 세금도 걷어서 그걸 가지고 마리화나 control에 사용할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사실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

이제 민우도 16살이고,
여러가지 생각이 꽤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되는대로,
여러가지 다양한 생각에대해 더 토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제에 대한 엉뚱한 처방

의사인 내 동생이 해준,
내 생각엔 아주 명언이 하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살을 빼려고 할때,
뭘 먹어서 빼려고 하는데, 그건 지혜롭지 못하다.
살을 빼려면 먹던것 가운데 살찌게 만드는 것을 먹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건 줄이지 않고 다른 무엇을 더 먹어서 빼려고 한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낮추는 일이나,
혈당을 관리하는 일이나,
혈압을 관리하는 등의 일들도 다 비슷하다.

정곡을 콕 찌르는 아주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살을 빼려는 사람이 다른 무엇을 먹어서 살을 빼려고 하는 이유는,
기존에 자기가 좋아하던 사탕, 과자, 기름진 음식 등등을 줄이기 싫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건드리지 않은채, 엉뚱한 처방을 하는 것이다.

영적인 건강에도 비슷한 원칙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지 않아서 영적인 기름이 잔뜩 끼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reach out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하는데,
그런 문제를 성경공부로 해결하려고 한다.

다른 예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잘 알아 깨닫는 것이 꼭 필요한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정작 성경은 읽지 않고 찬양집회에만 따라 다니며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취하고,
지나친 것을 줄여야 하는데…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자꾸만 더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영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사실 내가 이런 성향이 아주 강하다… 쩝.)

우리가 struggle하고 있는 어떤 영적인 갈증의 문제는,
너무나도 자주,
아주 정곡법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부활의 믿음

부활절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celebrate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금요일의 죽음과 고통 가운데 있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직 부활의 아침이 한참 남은, 토요일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어떤 분이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소위 ‘전통적’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는,
‘고통’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부활을 기뻐하고 celebrate하는 것과,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두움과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 걸까.

그저…
‘믿어라’ 라고 얼굴 벌겋게 되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는 key는 무엇일까?

Marcus Borg, John Dominic Crosan, Stanley Hauerwas, Walter Bruggemann 같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각각 어떠한가?

어제 부활절 예배는 참 좋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사순절 기간에 말씀 묵상도,
내게는 참 복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활절 잘 보내고 나서…
살짝 불량한 생각을 좀 해보았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