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6-24, 28-30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복음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뉴스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대한 충고가 아니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방향이라기 보다는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때로…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나,
당장 내게 어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때면,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이 상황에 대한 진보나 개선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된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대한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를 이해할때, 지금 내게 닥친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해준다.

도무지,
그 복음을 알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리게 된다.

주님께서 이루셨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주님께서 이루신것에대한 나의 온전한 이해이다.

이제 부활의 아침에,
나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라며 마음껏 죽음을 행해 조롱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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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고난주간에,
내가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한 것을 발견했다.
여전히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아래에 한번 덧붙여 본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숨을 고르며 성경을 읽다…

누가복음 22:63-71

성경의 어떤 부분은, 깊이 많은 생각을 하도록 나를 이끌지만,
성경의 어떤 부분은, 마음이 불타도록 만들기도 한다.

또 같은 본문이라도,
어떤 때에는 그 본문을 읽으며 많은 신학적 사색을 하게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가슴에 불을 지른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

성경가운데,
요한계시록은, 거의 언제 읽어도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게 만드는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고난 중에서 그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었을 초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상황 속에서, 보좌에 계신 어린양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온 세상 가득한 주님의 영광을 상상하며…
눈이 촉촉해져 벅찬 가슴을 나도 모르게 움켜잡게 된다.

누가복음의 이 본문을 읽으면서는,
하도 복창이 터지고 마음이 무거워져서,
나는 요한계시록의 몇군데를 읽었다.
마음이 무거워서 계속해서 주님의 고난 기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한동안 요한계시록을 읽고나서,
다시 돌아와 이 본문을 읽었다.

주님에 대한 웅장한 찬양이 담겨있는 계시록과,
그 찬양이 대상이신 주님께서 이토록 힘없이 모욕당하시는 이 본문 사이에,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간극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무 저항도 없이,
그 십자가를 향해 각오하고 걸어가시는 주님…
그 본문을… 숨을 고르며 숨을 참아가며 숨을 거칠게 쉬어가며 읽었다.

배신

마가복음 14:43-50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
꼭 그렇게 ‘배신’이라는 형태여야만 했을까?
그것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나는,
요한복음 1:11절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울컥해진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aspect 중에 하나.
결국 그 예수님을 배신한 배신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복음서를 처음 제대로 접했을때 바로 그랬다.
군중 속에서,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얼굴이 벌개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군중 속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오늘 나는,
가룟유다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결국 교활하게 예수를 배반하는 제자.

주님을 알기 전에,
그렇게도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주님을 피하며 지냈는데, 그리고 주님을 배반하면서 그렇게 지냈는데…
이제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오늘도… 나는 여전히 가룟유다의 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예전에 내가 처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때 뿐 아니라,
그 주님을 수십년간 따르며 살았던 지금, 바로 오늘에도… 정말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끊임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있는 내게,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니라,
‘용서’ 라는 사실이 여전히 나는 놀랍다.

바로 오늘, 지금도 나는 주님을 배반하고 있고,
바로 오늘, 지금도 내게는 십자가가 필요하고,
바로 오늘, 지금도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그리고 바로 오늘, 지금도 내게는 그 은혜가 복음이다.

겟세마네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목요일 밤/금요일 새벽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 목요일 저녁식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이 만찬을 함께 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으로 그 식사를 함께 하셨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사람들이 먹으면서,
아마 이들은, 예수님께서 뭔가 거사를 일으키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그렇게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전 유월절 만찬에서 함께 거하게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말하자면 술에 취해서 그랬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와중에,
우리 주님께서는…
묵묵하게 고통스럽고 외로운 메시아로서의 기도를 하신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기대를 가지고 술에취해 자고 있을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태의 심각함을 그저 혼자 받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두려움이나 갈등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셨겠지만,
진심으로 외로우셨것이다.

3년동안이나 함께 하면서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
자신이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때,
그저 골아떨어져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정말 많이 외로우셨다.
어쩌면… 자신을 외롭게 만들어놓고 있는 그 사람들이,
다시는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혼자 그 외로움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겟세마네가 그렇게 읽힌다.

예수님의 외로움의 고통이 마음에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