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43-50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
꼭 그렇게 ‘배신’이라는 형태여야만 했을까?
그것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나는,
요한복음 1:11절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울컥해진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aspect 중에 하나.
결국 그 예수님을 배신한 배신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복음서를 처음 제대로 접했을때 바로 그랬다.
군중 속에서,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얼굴이 벌개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군중 속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오늘 나는,
가룟유다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결국 교활하게 예수를 배반하는 제자.
주님을 알기 전에,
그렇게도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주님을 피하며 지냈는데, 그리고 주님을 배반하면서 그렇게 지냈는데…
이제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오늘도… 나는 여전히 가룟유다의 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예전에 내가 처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때 뿐 아니라,
그 주님을 수십년간 따르며 살았던 지금, 바로 오늘에도… 정말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끊임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있는 내게,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니라,
‘용서’ 라는 사실이 여전히 나는 놀랍다.
바로 오늘, 지금도 나는 주님을 배반하고 있고,
바로 오늘, 지금도 내게는 십자가가 필요하고,
바로 오늘, 지금도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그리고 바로 오늘, 지금도 내게는 그 은혜가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