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누가복음 22:14-20

나는, 교회에서 하고 있는 성찬식을 거부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건강한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라고 하셨을때,
이렇게 ‘예식’을 하라고 하신 의미로만 해석해야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있다.

혹시…
늘 이렇게 식사를 할때마다,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피와 살을 내어놓으신 것을 기억하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무리하게(?)) 확장하자면,
정말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서,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살라는 당부는 아니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상찬의식을 참 좋아한다.
정말 주님의 피와 살을 기억하는 의식을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의식이 참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내 일상은? 그저 이 일상은 ‘정복 혹은 변혁해야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들입다 열심히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혹시, 그 일상 속에서,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로마의 권력, 유대교의 종교 권력 앞에서,
그저 힘 없이 자신을 내어놓으신 주님의 희생을,
내 바쁜 일상 속에서 기억하면서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I still don’t get it.

마태복음 21:6-10

예수님께서는,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다.
이제 정말 영광스러운 역사의 가장 중심적 사건이 일어나려는 순간인데,
이제 정말 악에대한 궁극적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는 순간인데,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가신다.

물론,
구약의 예언을 이런 식으로 성취하신 것이라는 것 알고 있고,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겸손하셔서 그렇게 하셨다고.

아니,
그런데 왜 정말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
정말 나귀를 타고가셔야만 했던 걸까.
그것보다 조금만 더 괜찮은거 타고 들어가셨다면 그래도 조금더 상징성이 있지 않았을까.

결국,
예수께서는, 그 ‘승리의 입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심으로써,
승리가 힘에의한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논리에 의한 승리임을 보이고자 하셨던 것을 아니었을까.

그렇게 인간적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방법은, 그 힘에의해 오히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궁극적 승리를 얻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닐까.

정말 예수를 꽤 오래 믿고 살아왔고,
나름대로 참 열심히 주님을 따르며 살고자 노력 많이 했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힘’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적 희생과 겸손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내 상대방을 제압하고 정복함으로써 승리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이 잘못된 본성 (sinful nature)를,
그야말로 들어내어버리고 싶은데,
이 생각이 이토록 바뀌질 않고 있으니…

이렇게 더디 변하는 나 같은 사람도,
주님께서는 뭐 볼것 있다고 여전히 붙들고 계시니…
나귀를 타신 예수님 앞에, 내 옷이라도 좀 펴고 경배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더러운 죄악된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 조차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그저 목 놓아 찬양하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까

GPS 네비게이션 기계를 가지고 모르는 길을 찾아 나섰다고 생각해보자.
며칠동안 운전을 해야하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가면서 밤도 보내고, 식사도 하고, 연료도 채워넣어야 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한 밤중에 양쪽으로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좁은 길을 몇시간씩 운전을 해야하게 될수도 있고,
안개가 자욱해서 1마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나와서 그곳에서 화장실도 가고 기름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때도 있다.

거의 일주일 동안 운전을 해야하는 거리.
3-4일 정도 왔을 때, 문득…
그나저나 이 GPS가 고장난 것은 아닐까.
이 GPS를 내가 잘 못 읽고 가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상당히 난감한 일이다.

정말 GPS가 인도하는 길이 제대로된 길인지 의심이되면,
길을 가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볼수도 있고,
GPS의 매뉴얼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그 GPS의 direction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따져볼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내가 30년전, 20년전, 10년전, 심지어는 불과 5년전에 생각했던 ‘미래의 내 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GPS가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안내를 해 주어서 방향을 잡곤 했고,
때로 GPS의 안내를 잘 못 읽고 나면 re-routing을 통해서 길을 바로 잡는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 계획과 바람대로 내 인생의 자동차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는 정말 그 GPS를 완전히 의존하고 가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어 보인다.

지금,
과연,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기는 한걸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감성적으로, 혹은 그냥 직관적으로… 여러가지를 따져 보았을때,
정말 대안은 없다.
때로는 별로 친절한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이 GPS 붙들고 가던길 계속 가는 수 밖에.

이제 40대 후반의 중년 아저씨로서,
때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걸어왔던 길이 정말 제대로된 길일까 하는 의문이 들때가 있다.
아니 그만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왔으면 이제 그런것좀 덜 의심하고 갈만도 한데,
여전히 나는 GPS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파워를 컸다 켜보기도 하면서… 재확인하고 싶어하곤 한다.

요즘 금요일마다 만나서 함께 말씀과 삶을 나누는 한 친구를 생각하며,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며,
그 친구의 모습에 비친 나를 보며,
GPS를 흔들어 본다.

나를 이해시키기, 내 이야기를 하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내 생각을 잘 이해하는 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이 전혀 딴 이야기를 하면,
대단히 upset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곤 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말 나와 내 생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회의를 하게 되었다.

나와 생각이 참 잘맞았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아… 이 사람과 나는 결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참 많이 했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언젠가부터는, 타인이 나를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포기하게 되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이 생각을 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뭐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요즘도 가끔,
그래도 내 생각을 좀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목마름을 가져보는데,
뭐 그냥 늘 실망으로 끝나고 만다.

시간이 지날 수록,
생각은 급격히 쌓여 가는데,
그것을 다 설명하기는 더 어렵고,
그 와중에 생각이 계속 진화해가니…

그래서 아마,
이렇게 생각의 작은 흔적이라도 계속해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Preach to yourself!

마틴 로이드-존스는,
Spiritual Depression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신에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한동안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이 제안에 대해 꽤 skeptical 했었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에게 preach 할 수 있다면 왜 spiritual depression에 빠지겠어?

그러나,
요즘은 로이드-존스의 그 제안을 반복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벌써 거의 2년여동안, mild한 spiritual depression을 겪고 있는 중이다

최근,
어떤 후배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예전 같으면 내 마음에 정말 불이 붙어 그 목마름을 공감하고 공유하고 함께 기도하고 했을 텐데,
요즘은 그렇게 불타는 마음이 내게 없다.

가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내 마음이 냉랭한 상태이다.

제약이 많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깨어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이겠으나,
이런 상황 속에서, 반복해서 내 영혼을 향해 preach 하는 일을 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교, 공동체, 예배, 자라남

나는, 설교가 예배의 핵심에 들어가 있는 것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

‘예배’라고 되어 있는 세팅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worship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과연 가장 최상의 예배 세팅일까 하는 의문이 늘 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경우,
교회에서 예배 설교의 역할은, 그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그 교회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바를 계속 해서 remind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 시간의 설교는,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복해서,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하여 재확인하고, 잘못된 길로 교회와 교인들이 흐르지 않도록 막는 일종의 ‘가드레일’역할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너무나도 자주, 목회자들은 설교 강단에서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와 연관해서, 나는,
사람들이 ‘설교 잘 하는 사람’을 쫒아다니며 교회를 옮기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소비주의 성향의 대중이 선택하는 ‘좋은 설교’의 기준은,
메시지의 건강함이라기 보다는, 설교자의 테크닉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Shiker 목사님은,
스스로 늘 자신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우기신다.
아마 자신의 설교에 화려한 기교나 웅장한 카리스마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어쩌면 뭐 그런 기교나 카리스마가 없다고 생각될수도 있겠다.

그런데,
최근 Shiker 목사님께서 무슨 작정을 하셨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Shiker 목사님에 대해서 무슨 작정을 하셨는지)
요즘 계속 설교의 칼 끝이 살아 있음을 경험한다.

게다가 더더욱 감사한 것은,
설교자 혼자 방방뛰면서 교인들을 무리하게 drive 해가는 설교라던가,
혹은 교인들의 상태와 무관하게 그저 ‘일반적인’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와 교회와 교인이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Hana Seed Church에서는,
목사님과 ‘흔한’ 30대 평신도 두명이 함께 teaching team을 구성해서,
그 teaching team이 설교의 내용과 방향을 정한다.
나는 그 teaching team의 사람들을 모두 다 잘 알고 있으므로,
때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J 형제나 E 형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지난 주일 설교 서두에서,
Shiker 목사님이,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주 힘들었다고 하시면서,
설교가 별로 일 것이라고 미리 설교 전에 초를 치셨다. ^^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나서 나는,
그냥 한편의 좋은 설교를 들은 것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공동체의 살아있는 생명을 경험했을때 느끼는 감동을 가지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사족)
사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다 어땠다 하는 이야기를 여기 쓰는게 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그 설교를 하신 분이 이 블로그를 자주 읽으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능하면 안쓰려고 하는데… 앞으로는 가능하면 내가 들을 주일 설교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기로 결심 중이다. ㅎㅎ

블로그의 옛글들

내가 이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8년 3월 말 – 4월쯤 된다.
그 이전에도 여기 저기 글을 좀 쓰고, 모아놓은 것이 있었지만,
2008년 4월경부터, ‘매일 하나씩’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블로그의 글중 가장 오래된 글은, 아마 내가 대학교 4학년때 쓴 글인 것 같다. 나는 사실 별로 글쓰기에 관심이 없었는데,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는 급격히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져서 그때부터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빠졌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하나씩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거의 7년정도, 거의 매일 글쓰기를 해 온 셈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내 글은, 지금으로부터 25년여 전에 쓴 글들도 있다.

특별한 몇개의 글을 제외하고는,
글 하나를 쓰는데 대충 5-10분 이상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쓰고 있다.
(proof-reading은 커녕 한번 그 글을 쓴 이후에 다시 그 글을 읽지 않게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렇게 하다보니, 글의 완성도는 심각하게 형편 없지만,
내 생각이 좀 더 가식없이 드러나게 되는 장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블로그를 옮기면서 예전의 글을 몇개 다시 읽게 될 기회가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어떤 글들은 생각의 깊이도 형편 없고 글쓰기의 완성도도 보잘것 없는 것들이 있지만,
또 내 생각이 계속 진화하므로 예전 글들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지만,
아주 가끔은… 지금 읽어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싶어 놀라는 것들도 있다.

해서,
한주에 한번 혹은 두주에 한번 정도는,
예전 글들 가운데 다시 생각해볼만한 포인트가 있는 것들을 다시 올려보려고 한다.

이 블로그에 쓴 글 가운데에는,
내가 20대 초반에 쓴 글들도 있으므로…
당연히 지금은 그 생각이 많이 발전하거나 변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내가 스스로 내 생각과 삶과 신앙의 궤적을 점검해 보고 싶은 것이다.

욕심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Plasma process modeling 분야에서 top 3 혹은 top 5를 꼽으라면 그중 하나에 드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지도교수와 학회에 가면 그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학생들 가운데에서는 소위 학회에서 ‘스타’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학생때부터 invited talk을 몇개씩 하러 다니고, 학회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렇게 ‘스타’가 된 사람들에 비해서 별로 뒤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조금만’ 더 손을 뻗어서 노력하면, 그런 동료들 이상으로 ‘스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런 환경이 나를 망가뜨렸다는 것을 발견한건, 거의 졸업이 가까워져서 였다.
나는 하나님보다, ‘뜨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보다 더 뜬 사람들을 보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시기심이 들고, 나보다 덜 뜬 사람들을 경멸했다.
하나님도 신앙도 모두 뜨는데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었다.

졸업전에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많이 마음아파하면서,
말씀으로 나를 일년여 다스리고나서야,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최근,
내가 일을 하면서 그런 trap에 빠져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전형적인 증상은,
나보다 못해보이는데,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을 보면 억울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초조하게 느끼기도 하고, ‘뜬’ 사람들의 장점을 보기 보다는 단점을 보면서 끌어내기기 바쁘다.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회복해야할 때다.

그래도…정말… 괜찮다고?

몇달 전,
교회에서 갑자기 설교하시기로 한 분이 빵꾸를 내시는 바람에,
내가 급하게 준비해서 설교를 해야 했었다.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심지어는 어떤 내용을 다루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설교의 가이드라인과 내용이 거의 정해진 상태였다.

그때,
이런 내용을 다루었다.
하나님께서 결국 세상을 바꾸시는 주체이므로,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렇게 찌질하게 사는 것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상대해야하는 vendor/하청업체, 작은 회사들에게는,
가능하면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서 노력을 참 많이 한다.
진정으로 그 회사에게 도움이 되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최근에는,
내가 상대하는 vendor 가운데 하나가,
말하자면 원하는 데이터를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쪽에 꽤 큰 손실이 났다. (대충… $100K 정도.)
그렇게 한데에는, 우리 매니저가 잘못된 결정을 한 이유가 대충 80%쯤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에게 80%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사람이,
$100K failure가 생겼기 때문에,
대충 $30K 정도가 드는, 다음의 작은 실험을 공짜로 해내라고 이 vendor를 쪼이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한 잘못을, vendor에게 뒤집어씌우고자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 하청업체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그렇게 쥐어짜는 일에 연관이 되고 있다.

정말… 정말… 못할 짓이다.
정말 fair 하지 않다.

예전 같으면,
이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당장 그 매니저랑 한판 붙거나,
그 상황을 당장 바꾸어 보겠다고 고민하고 노력하고 했겠지만…

지금은,
일단 지켜보면서 흐름을 보고 있다.
(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므로)
나름대로 내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 그나마 내가 그 회사를 조금 더 도와줄 수 있는 room이 생기기 때문에,
그냥 버티면서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상사를 견디어 가며,
먹고살 돈을 벌면서 찌질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괜찮은 겁니다.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저 소시민으로 지금 당장 살고 있더라도,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홍해를 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사람들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변혁하려는 노력을 잘 기울여서가 아니라,
홍해가 갈라짐으로써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뭐 대충 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정말…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연약한 사람을 붙드시는 주님

몸과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만나면, 함께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그렇게 힘든 사람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 같이, 내가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무언가 해야할 것 같은데, 막상 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막막함과 무력감.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좀 개입하셔서 풀 것을 풀어 주셨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 삶의 무게를 보며 가슴 아파하다가도,
결국 그 사람을 붙들어주실 수 있는, 붙들어 주셔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한편 위안을 얻지만 한편 무력감도 느낀다.

내 삶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때,
결국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시지 않으면 내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하고나면 부쩍 내 믿음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곤 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내가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도,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아님을 인정할때,
비로소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모님께서
오늘 귀국하신다.
참 반갑고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