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게되는 예배중의 기도

지난 주일에,
어느 자매가 예배 기도를 인도했다.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기도했는데,

첫번째는,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실리콘 밸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기도였다.

두번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 system의 피해자이라는 사실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system의 일부이자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였다.

나는 우리 작은 그룹이 그렇게 기도하는게 무슨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겠나… 싶기도 했지만,
혹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주시고 우리를 움직이시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참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다.

참고로,
한주 쯤 전에,
교회의 한 형제가 다음의 링크를 교회 이메일로 share 해주었다.

cnn에서 실리콘 밸리의 가난에 대해 다룬 내용이다.
http://www.cnn.com/interactive/2015/03/opinion/ctl-child-poverty/

정말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정말… 마음이 아픈… 그런 충격이었다.

또,
몇주 전에는,
이런 글을 쓴 우리 교회의 한 친구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이시는 걸까?

당신의 노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제발…

나는 facebook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 심심하면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어보기도 한다.

뭐 어쩌다보니, 꽤 유명한 목사님들과 ‘친구’가 되어 있는경우도 있고,
아니면 내가 일방적으로 그분들을 follow 하는 경우도 있다.
꽤 유명한 목사님뿐 아니라, 그리 유명하지 않은 목사님 친구들도 사실 꽤 있다. ^^

그런데,
거의 90% 이상의 목사님들의 facebook 포스팅을 보면 이런 식이다.
오늘 내가 어디서 설교를 했다. 했더니 사람들이 울고 난리가 났다. (혹은 반응이 좋았다.)
아..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잘 쓰시는 하나님의 종인가!
(뭐 직접적으로 이렇게 쓰시진 않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그런거지.)

혹은 이런식의 포스팅도 많다.
어제는 대전, 오늘은 광주, 모레는 부산 집회다.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겠다.
아 이렇게 바쁜걸 보면, 정말 나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인게 분명하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정말 꼭 드리고 싶은 직언이 있다.

당신이 가수라고 합시다.
매니아층이 존재한다고 해서, 당신이 뛰어난 음악가인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잠깐 대중이 헤까닥 해서 집단적으로 오빠~를 외치고 환호한다고 해서 당신의 음악성이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노래를 듣기에 대단히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당신이 아주 바쁘게 활동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음악성이 훌륭한것도 아닙니다.
아주 바쁜, 허접한 가수일수도 있습니다.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서, 당신의 음악은 쓰레기와 같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당신의 노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제발 자기 도취에서 좀 빠져나오십시오.

그런데,
이 직언은,
목사님에게뿐 아니라,
수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나 같은 그냥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콕~ 찝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 뜨끔하다.

하나님의 영광

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사실 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잘 알아 봤지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현실적으로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은,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도무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조금씩 복음에 눈을 떠가는 모습,
영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그야말로 ‘찌질한’ 모습으로 있던 사람의 얼굴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환하게 변해가는 모습,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에 흠뻑 젖어 있던 사람의 삶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는 것

등등을 보면,
아…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보인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여러가지 일반은총의 영역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감사하고 감탄하는 것이 매우 값지고 중요한 일이겠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한 인간이, 그 형상의 일부분을 회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을까.

두 종류의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1.
의인과 죄인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다.

2.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길을 자신이 개척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3.
승자와 패자가 아니다.
그것은, 승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4.
잘잘못을 잘 가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용서를 할 줄 아는 사람과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5.
사랑이 많은 사람과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음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Apple의 innovation이 안타까운 이유

애플의 제품은 참 보기에도 좋고 쓰기도 좋다.
iPod, iPhone을 만들었고, iPad와 macbook 등을 만들어낸 애플은 참 대단한 회사이다.

그렇지만,
나는 애플의 ‘혁신'(innovation)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애플의 innovation은, 결국 이미 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improve 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플에서 ‘혁신적으로’ 내놓았다고 하는 제품들은 모두, 이미 다른 곳에서 다 했던 것들이었다.
iPod는 mp3 player이고,
iPhone은 이미 blackberry나 기타 Palm 등에서 했던 것이고,
iPad 역시 이미 태블렛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플이 한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약간 새로운 기능들과, 매우 공을 들인 user interface를 가지고 잘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Apple doesn’t make something for the first time, but it does make something right for the first time.(애플은 무엇이든 처음으로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애플은 무엇이든 처음 제대로 만들어 낸다.)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같다.

2. 애플의 innovation은 big innovation이 아니라, big collection of little innovations 이다.
이번에 나온 macbook을 예로 들어보자.
새로운 키보드 넣었고, high resolution 스크린 넣었고, 터치패드를 바꿨고, 배터리등 여러 부품들 다시 design 했고… 이런 작은 innovation (사실은 innovation이라기 보다는 improvement라고 해야하지 않을까)들을 모아서, 더 얇고 가볍고, 고해상도 스크린의 랩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정말 ground-breaking 하는 진정한 의미의 innovation은…

3.애플의 innovation은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innovation의 동력을 약화시킨다.
애플의 상품소개 event를 들어보면, incredible, ground-breaking, unbelievable, completely, amazing 등등의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사실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innovation은, 작은 start-up 들에서 대부분 이루어 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공한’ 일부 start-up 들은 애플의 하청업체(vendor)로 들어가게 되는 거다.
그러면 애플은 30%의 profit margin을 먹으면서, vendor들은 겨우 적자를 면할 정도의 profit margin으로 연명을 하는 체제가 된다.
그나마 그렇게 애플에 채택되는 start-up들은, 조금 더 검증되고 성숙한 technology들을 가진 회사들이다. 정말 아주 새롭지만 아직 충분히 개발이 되지 않은 기술은, 험한 비바람을 맞으면서 운이 따라줄때까지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한다.

4. 애플의 innovation은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결국 애플에서 내어놓은 product은, 당장, 수천만의 고객이 살 수 있는 product 이다.
일단은 수천만명이 사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아주 새롭고도 대단한 idea를 애플이 연구-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promote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당장 큰돈이 되는 기술만을 채택하는 것이다.
앞으로 1년 이내에 수천만명이 사는 product로 만들어낼 기술만을 추구하면,
정말 향후 10년 이후에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찬밥신세가 된다.
사람들은 결국 당장 1년 후에 돈되는 small innovation에 목매게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next big thing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5. 애플의 혁신은 결국 기술의 혁신이라기보다는 경영의 혁신이다.
애플이 잘 하는 것은, 여러 작은 기술들을 control tower에서 잘 정리해서 넣어야 할 것과 뺄것을 잘 구분해내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좋은 디자인과 함께 엮어서 내는 것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manage해서 organization 전체가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경영을 잘 한다.
때로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때로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해서, 심지어 때로는 소문을 살짝 흘리면서 (이건 그냥 내 guess).. 소비자들의 관심을 잘 유지해내고, 소비자가 필요한 것을 잘 catch해낸다.
그게 그냥 좀 잘하는게 아니고, 다른 회사에 비해서 월등하게 잘한다.
그러니, 애플이 만들어놓은 그 framework에 함께 들어가서 그런 방식으로 경쟁하면 밀릴수 밖에 없다.
나는 경영 혁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경영 혁신이 기술 혁신은 아니다.

엔지니어로서,
그리고 애플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현재 apple에서 팔리고 있는 product와 아직 시장에 나오지 않은 product 개발에까지 참여한 사람으로서,
나는 애플의 innovation을 appreciate 한다.

그렇지만,
애플이 마치 세상의 모든 innovation을 하고 있는 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다.
내가 보기에, 오히려 애플은 진정한 innovation의 장애가 되고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보지 못한다.

지난주일,
목사님의 설교가 참 인상적이었다.

결국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 기만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었는데…
그러면서 소개해주신 책을 그날로 사서 읽고 있다.
(사실 요즘 정말 시간이 없어서 책 읽는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은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I told me so
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Dallas Willard 밑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란다.
그래서 책의 추천과 서문도 Dallas Willard가 썼다.

아직 별로 많이 읽지 못했지만,
완전…. 대박…

이 책에 의하면,
자신에게 충실하여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주,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허걱..
나는 설교를 듣는 그 순간부터,
이거 완전 내 얘기인데…. 싶었다.

음….
이렇게 공동체적인 교회에 다니는 큰 유익 가운데 하나는,
목사님께서 이렇게 나 같은 사람을 향해 ‘표적설교’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그래서,
목사님께서 나를 향해 ‘표적설교’를 하시는것이 정말 일차적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딱 그럴 것 같지는 않다. ㅋㅋ)

나는 그걸 나를 향한 ‘표적설교’로 알아듣고 책을 읽는 중이다.

자신의 인생을 감당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가끔은,
아니 솔직히 너무 자주…

어떤 ‘인생’을 경영하고 관리할만한 준비와 능력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로 나이가 들어버린 어른들을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over-react 하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것인데 별것 아닌냥 방치해 놓기도 한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정말 많이 힘들다.

그 인생을 자신이 제대로 운전해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렇게 운전해 간다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로인해 생긴 수많은 왜곡을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도무지,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은 없다.

누구 얘기냐고?
거울을 보면서 쓰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어디 나만의 문제이랴.
결국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겠나.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나에게,
은혜는 유일한 소망이다.
내 밖으로 부터 오는 은혜.

참을성

성숙함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참을성’이 아닌가 싶다.
이 참을성에는 두가지가 있다.

참을성(patience)이라고 하면 시간에 대하여 조급함을 참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시간에 대한 조급함을 극복하는 것은, 참을성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Patience는 기본적으로,
내게 힘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다.
내가 유난히 힘들어 하는 어떤 것을, 묵묵히 꾸준히 참아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시간에 대한 조급함이 될 수도 있고,
인격적인 모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preference에 대한 선호가 될수도 있고,
신체적 고통,
혹은 불편함이 될수도 있다.

그리고
Patience는, 하나님에대한 신뢰의 강력한 표현이다.

언젠가부터…
기독교로부터, Patience에 대한 강조가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은 오래참고…

직장에서의 괜한 오지랖?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직장과 비교해 봤을때,
순전히 직장의 reputation만 보면, 지금 내 직장이 가장 별로인 것 같다. ^^

HP Labs은, 그래도 몇개 안남은 꽤 잘 알려진 민간 연구소였고,
Apple은… 뭐 Apple 이고.
그런데 지금 직장은, 뭐 중국회사라는 이미지도 있고 해서…
컴퓨터를 많이 팔기는 하지만 뭐 innovation으로 유명한 회사도 아니고…

하지만,
Apple에서 하던 일과 비교했을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훨씬 더 재미도 있고, 배우는 것도 많다.
실제로 내가 contribute하는 정도도 더 많고.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일의 범위도 훨씬 더 넓다.

하지만,
linkedin에서 recruiter가 접촉해오는 빈도로 보면,
사실 apple에 있을때 보다 훨씬 더 적다. 거의 절반 수준?

그런데,
이번주에, 이 동네에 있는 어떤 크고 유명한 어떤 회사의 리크루터가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자기쪽에서 급하게 사람을 찾는데 내가 잘 맞는 것 같다고. 관심이 있느냐고.

살짝~ 잠깐~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우리 매니저가 뻘짓을 한걸 내가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에이씨… 저 사람이 뻘짓한건데 내가 개고생이네… 하면서 불만이 가득했던 상태였다.

확~ 저쪽에 연결하고 한번 진행을 해봐?

그러다가 다시 생각했다.
저쪽이야 내가 가지 않아도 누군가가 가서 잘 할테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short notice 주고 확 떠나버리면 우리 그룹은 정말 많이 어려울거다.
지금 사실 꽤 critical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말 타격이 클테고… 사람들의 morale도 심각하게 떨어질테고…

그러면서 예전에 HP를 떠나기 직전이 생각이 났다.
우리 그룹이 해체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고…
그렇지만 나는 내가 먼저 이 그룹을 자발적으로 떠나지는 않겠노라고 마지막까지 이 프로그램을 살리는 노력을 다 하겠노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그 그룹에서 가장 먼너 떠난 사람중 하나가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그 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내가 거기 더 있었다고 해서 아마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먼저 떠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했던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그룹에 대해서는,
예전의 HP 그룹만큼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팀 사람들, 특히 매니저와 그렇게 돈독한 friendship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뭐 의리를 지키고 사람들을 어떻게든 세우고, 이 프로그램을 꼭 성공시키고…. 뭐 그런 비장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괜한 오지랖일까.

결국,
그 리크루터에게… 나 대신에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을 추천해주었다. (예전 hp 동료)
오늘 그 예전 동료가 그러는데, 사실 그 position에 한주 전에 어플라이를 했단다.
그 친구가 잘 되면 좋겠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과,
어느정도의 연대의식을 갖는 것이 좋은 걸까?

마치 그룹에서 벌어지는 일들중 펑크가 난 것을 내가 메워야 한다는 urgency를 느끼면서 이렇게 일하는건 괜한 오지랖인 걸까?

언젠가… 혹 내가 이 그룹을 떠나게 된다면,
그건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할까? 어떤 이유에서일까?

대답없는 질문들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건강한 보수가 없다면…

‘보수’는,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켜내는 입장을 견지한다. (혹은 해야한다.)

보수가,
지켜야할 가지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가치를 주장하게 되면,
전체 balance가 깨어지는 것 이외에도,
막상 지켜야할 가지가 지켜지지 못하는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한국의 정치적 보수가 그렇다.
지켜야 할 가치(자유, 법치, 공정, 헌신 등등)가 아닌 엉뚱한 가치(공작정치, 정경유착, 편법, 억압 등등)를 보수하려고 하나보니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balance를 잡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지고,
막상 지켜져야할 가치는 사회 전체적으로 내동댕이 쳐저있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를 진보적 복음주의와 보수적 복음주의로 나누었을때,
소위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건강한 agenda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voice로 내는데,
막상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에 반대를 할 뿐,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라면,
교권주의, 이원론, 정치적 보수주의, 개교회주의, 맹목적 교회 성장과 같은 모습을 지켜낼 것이 아니라,
은혜, 사랑, 믿음, 계시, 성화 등등의 전통적 신학적 주제들이 어떻게 이 시대에 relevant한 것인지를 이야기해주어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보니,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건강한 개념들 자체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나는 스스로 진보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요즘은 그 건강한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가 많이 많이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