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 대하여 (4) – 경험이 지혜를 제한할때

나는 Plasma processing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불행이기도 하고, 한편 다행이기도 한데…

내가 박사를 받은 분야는,
말하자면 충분히 mature한 분야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론이 거의 다 완성이 되었고,
사실 나는 그 분야에서 마지막으로 이론적인 부분을 정리한 일단의 사람들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뭐..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분야에서 더 이상 ‘모르는 것’이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행은, 그렇기 때문에 이 분야가 엄청 새롭게 뜨는 그런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다행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plasma processing에 대해 아주 통합적인 체계를 잘 갖게 될 수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을 할 때에는… plasma는 어려워… 그런 그냥 trial-and-error로 때려잡을 수 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던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processing의 결과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던 process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이 사람들로부터, 매우 자주, 아주 유용한 경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또… 너무 자주… 이 사람들이 내가 경험바에 의하면 이런거야… 라고 우기면 대책이 없게 되기도 한다. -.-;

말하자면,
내가 파리 날개를 떼어보았는데, 귀를 먹더라는 것이다.

차라리 현장 경험이 없다면,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부실하게 integrate 한 것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경험이 올바로 integrate 되지 않을 때, 경험은 오히려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된다.

사실 이런 것은,
기독교 세팅에서 많이 발견된다.

배우자 기도 리스트 놓고 기도했더니 기도가 응답되더란다.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아들이 서울대 가더란다.
집을 팔아 교회 건축에 헌금했더니 사업이 컸단다.

뭐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QT sharing 모임같은데 가면 너무 흔하게 듣는다.
말하는 사람은 감격해서 눈물도 흘리고, 듣는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하는데…
막상 내용은 이상하고…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integration 없는 경험은 지혜를 제한한다.
종교적 세팅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혜에 대하여 (3) –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대개 현자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백발에 인자한 미소를 띈, 도인과 같은 모습이다. -.-;
혈기 왕성한 20대의 젋은이로부터 지혜를 구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 생각은, not necessarily 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한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책상 위에 있는 파리를 향해 소리를 치며 책상 옆을 탁 쳤다.
파리가 휙 날라갔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큰 소리를 잘 듣는다”

그 후에 파리를 잡아서, 날개를 떼어버렸다.
그리곤 책상에 놓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리가 날지 못했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날개를 떼면 귀를 먹는다”

파리 날개를 떼어서 소리를 지르는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통합해내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경험은 오히려 잘못된 생각을 build up 하는데 사용되고 만다.

올바른 통합(integr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은,
오히려 어떤 사람을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지혜에 대하여 (2) – 진리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진리란, 세상이 움직여지는 universal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여러가지 지식을 담아낼 수 있는 일종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예를 들면,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 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면,
우유는 오래두면 상하는데… 과연 계란은 오래두면 상할까? 라는 질문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다.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는 ‘진리’가 없으면,
음식재료마다 이건 오래두면 상할까 하는 여부를 경험을 통해서 조각조각 모아야한다.
그리고 가끔은… 어? 우유는 냉장고 밖에 놓으면 하루만에 상하는데, 김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네. 아마 김은 상하지 않는 음식인가보다… 뭐 이런 황당한 결론에 도달할수도 있다.

때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오래 살아온 어른들을 보면,
그분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참 지혜로운 모습을 보게된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믿고있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맞닥드렸을때, 참 지혜롭게 결정하고 행동한다.

나는,
그런 분들의 지혜는, 진리를 몸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at least partially)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어떤 곳이고,
죄가 어떤 것이고,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냥 ‘온 몸’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이야기하고, 나도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많이 배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지식을 많이 이야기하긴 하는데,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졌다.
프로그램을 통한 지식의 공급을 이야기하지만, event를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것을 통합해내는 지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깊은 신앙에서 나오는 진리를 가진 어른들에게서 보게되는 지혜의 광채를,
과연 내 세대나 내 다음 세대로부터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지혜에 대하여 (1)

지혜란 무엇일까.
Wikipedia에 따르면, 지혜는 지식, 경험, 이해, 상식, 통찰들을 사용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한다.
(Wisdom is the ability to think and act using knowledge, experience, understanding, common sense, and insight.)

나는 뭐 철학에 관하여, 문외한에 가까우므로, 지혜의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주변에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되는데 (특히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는)
그런 대비를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조금 더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같긴 하다.

지식이 도구라면, 지혜는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식재료라면, 지혜는 요리기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지혜는 지식과 경험 등을 통합해 내는 (integration)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자주…
지식을 지혜로 환원시키려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정말 지혜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요즘,
잠언을 묵상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혜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알지 못하신다?!

Open theism (한국어로는 열린신론 이라는 번역을 쓰는 것 같다.)은 참 흥미로운 관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예정하시거나 알고계신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예전에 eKOSTA에 내가 아끼는 동생 한 사람이 이것에 관해 글을 쓴적도 있었다.

결국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설명해보고자 하는 기독교적 시도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면, 도무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 왜곡, 고통의 문제를 설명해 내는 것이 정말 너무 어려운 것이다.

현대의 open theism이, 20세기 초반의 ‘과정신학 (Process Theology)’로 부터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지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 아마도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하지만 예전에 과정신학에 대한 짧은 글을 읽으며 참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진화 하시는 하나님. 피조세계와 소통하시며 발전하시는 하나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그래도 어느정도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는 나로서는,
때로 신학에서 지나치게 ‘시간’의 이슈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답답해 보일때가 있다.
(이 문제는 언제 한번 이 블로그에서 더 풀어봐야겠다. 그룹 성경공부 같은 데에서, 이런 이야기를 몇번 불어봤는데… 나 완전히 왕따되는줄 알았다. ㅎㅎ)

하나님께서 선하신 창조자이시고, 전지전능 하시다는 전통적 견해와,
지금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control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런 생각이…
뭔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 주변과 세상의 아픔을 놓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마음이 답답해서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다.

(오늘 글은, 너무 cryptic 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시는 독자가 많을 줄 아는데… 다음에 좀 더 잘 정리해서 한번 제가 생각하는 시간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올려보겠습니다. ^^)

이혼에 대해서 (4)

나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아름다운 가정을 promote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 = 좋은 가정 식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내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가정을 너무 우상화하여서, 하나님을 상대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히려,
가정자체를 하나님의 절대성 앞에서 충분히 상대화할때,
가정을 제 위치에 놓고 보는 perspective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좋은 가정 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풍족한 경제생활 이나, 기독교=직업적 성공 의 등식이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독교=좋은 가정의 등식 때문에,
깨어진 가정의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곤 한다.

기독교 복음은,
깨어진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뉴스이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 바로잡아지게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뉴스이다.
그러나, 복음이 깨어짐의 해결이 immediately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때로 그 깨어짐의 해결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욱 자주, 오히려, 그 깨어진 모습 속에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

….

나는 이 글의 처음에 내가 언급한 대로,
이혼을 교통사고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안전운전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교통사고 예방책을 잘 만들되,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주고,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책임을 묻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 물론 운전자 과실로 교통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정말 많이 있다. 정말…)

언젠가,
하나님께서 언젠가 교통사고가 없는 system을 만드실테고,
교통사고의 아픔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으실테니.

이혼에 대해서 (3)

매우 관계가 좋지 않은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어려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되는 것이다.

관계가 나아지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장 그것이 어려울수도 있다.
그럴 경우, 단기적인 관계의 개선에 목을 매는것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야말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problem solver의 역할을 해주기 보다는
(물론 problem solver가 될때도 있지만…)
problem에 대하여 다른 perspective를 가지게 해준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좋은 부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애매하게 교통사고를 겪게 되는 것과 같이,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때, 그 깨어진 죄의 모습 속에서, 그 문제의 해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자신과 잘 맞지 않는 배우자와 평생을 살수도 있다.
그러면 서로 맞추어 가야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럴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혼에 대해서 (2)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혼을 피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정죄’에 치우치는 것이 많이 속이 상한다.

이혼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의 깨어짐은, 결국 죄의 결과이다.
여기서의 죄란, 개개인의 죄를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개념이다.
system 자체가 깨어진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Ultimate judge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정을 잘 꾸미고 살아가는 것이 참 바람직하고 아름답다. 성경도 그것을 promote 한다.
그렇지만,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지 정죄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는,
사랑과 공의가 충돌하는 것 같아 보일때,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하셨지만, 판단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분별하라, 지혜로와라 등등의 명령이 물론 있지만.)

거룩함에 대해서 흔히 공의로움과 연관을 시켜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거룩함은 구별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표지가 사랑이라면, 그리스도인이 가장 분명하게 세상과 다른 것도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혼의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혼의 과정 속에서 신앙을 잃고 하나님을 떠난 경우도 있다.

그 아픈 이혼의 과정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이들이 경험한다면…
그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주변의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느껴지게된다면…

이혼에 대해서 (1)

지난 주일 새벽에… (4시 경이었던가…)
한국에서 어떤 악당 한 사람이 카톡을 보내왔다.

이혼에 대한 어떤 분의 언급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몇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중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혼에 대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혼은 교통사고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1.
교통사고는 가능하면 내지 않도록 피해야 한다. 운전자의 일차적 책임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가는 것이다.
따라서 교통사로를 내게 된다면, 그것은 운전자가 지켜야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 된다.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는 것은 물론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부러 교통사로를 내면, 그 사람은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죄’이다.

2.
그러나 더 큰 사고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악을 선택하는 교통사고도 있다.
가령, 자동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봇대를 들이받는 다거나,
횡단보도의 사람을 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옆차와 가벼운 충돌을 하게 된다거나.
이혼도, 더 심각한 문제를 피하는 차악의 방법으로 선택할 경우도 있다. (가정폭력이라던가, 생명의 위협이라던가….)

3.
열심히 방어운전을 하고, 아주 열심히 하더라도, 교통사로를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4.
교통사고는, 어디까지가 부주의/잘못인지,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운전실력의 부족인지, 어디까지가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다.
이혼도 역시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순전히 이혼한 사람이, 인생을 잘 꾸려갈 능력이 없어서 (인격적, 경제적, 관계적, 감정적…)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이혼은 능력의 부족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말하자면 무능력인 것이다.
무능력을 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령충만과 성령충분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은,
성령충만과 성령충분을 구분해서 설명하셨었다.

성령충분은 헬라어에서 ‘흠뻑 적셔지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장기적으로 충분하게 채워진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이로인한 것은, 성품이 변화되고, 성숙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헬라어에서 ‘가득 채워지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일시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고, 여러가지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대천덕 신부님은,
신자라면 누구든지 성령충분을 경험하고 추구해야 하지만
또한 성령충만으로 인해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었다.

성령충분은 일회적이고 지속적이지만,
성령충만은 여러번에 걸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나는 신학적 깊이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적으로 성령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대천덕 신부님께서 말씀하신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바와 경험한바를 참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나는,
일반적으로 ‘수련회’가 남용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종교장사’를 하는 방편으로 수련회를 하곤 한다.

그렇지만,
가끔, 하나님께서 ‘수련회’를 통해서 특별히 성령충만을 공급해주실때가 있는 것을 경험했었다.

어떤땐,
정말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도 있었다.
그래서… 참 오랫동안 수양회 운동을 섬겼었고.

이번 주말에는,
하나의 씨앗교회의 수련회가 있다.
그리고 이제 인디에서 열린 수련회가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두달 후에는 시카고에서…

수련회를 통해서,
바짝 말라버린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일들이 있으면 좋겠다.
정말…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때로는… 도무지 사람이 무언가를 끌어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의 끝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기도 하지 않던가.

@ 그나저나, 대천덕 신부닝은 참… 그리운 분 가운데 한분이다. 내가 비록 그분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