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