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적실성

지금 교회에서 ‘안식’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지난 주에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담당이어서 설교를 듣지 못했다.
예배 끝나고나서 목사님이 이번주 설교 꼭 찾아 들어보라고 하셨다. 아마 내게 표적설교를 하신게 분명하다 ㅋㅋ
아직도 나는 설교를 듣지 못했다. 아마 며칠 이내에 들어보게 되겠지.
(이렇게 표적설교를 해주시는 설교자가 있고, 그걸 support하는 교회가 있으니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 ‘안식’이라는 주제로 설교 시리즈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반갑기보다는 다소 우려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위 ‘안식’에 대해서 다루는 글이나 책들을 잃어보았을때 너무나도 적실성 (relevancy)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안식이 좋은 것도 알고, 안식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는 것도 알고, 안식이 명령이라는 것도 알고… 다 아는데…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안식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닌걸 어떻게 하나.

가령,
옛날 화물선에서 함께 노를 젓는 노예들을 생각해보자.
노예들은 모두 채찍을 맞아가며 함께 노를 젓는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노예가 ‘안식’을 해야겠다면서 노 젓는 일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괜히 그 옆에 있는 노예들이 죽어나는 거다. -.-;

안식하지 못하는 노예선이라는 system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안식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노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결국 어떤 공명을 만들기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무책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Marva Dawn 같은 훌륭한 분의 안식에 대한 개념도, 내게는 목구멍으로 넘기기 어려운 알약과도 같이 느껴진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 의미있는 고민과 실험과 실패 등등이 있어야만 비로소…
안식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무엇이 탐욕이고, 무엇이 불신앙이고, 무엇이 저항이고, 무엇이 휴식이고, 무엇이 예배이고, 무엇이 용기이고, 무엇이 게으름이고, 무엇이 회피이고, 무엇이 비겁함이고, 무엇이 사랑인가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가 함께 안식의 설교를 듣는 것을 넘어서서,
안식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어떤 시도를 해보고,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격려하고, 나누고, 기다리는 일을 공동체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교회의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통해, 공동체가 그렇게 좀 움직여 볼 수 있으면 좋겠다.
https://lately.cc/eungyu/5621
어제 이 글을 읽고서 나도 한숨에 내 생각을 더해본다.

5 thoughts on “안식의 적실성”

  1. 고민, 토론, 논쟁, 격려에 대한 필요를 이미 몇몇 교우들이 얘기하네요. 좋은 나눔 감사해요. “저항”은 전문이시니 목졸님이 함 총대를 매 보시죠.. ^^

    1. ㅎㅎ 제가 무슨 그런걸 잘 하겠습니까
      다른 분이 잘 하시면 한번 따라가보고 싶은데요 🙂
      그나저나 지난 주 ‘표적 설교’ 궁금해 죽겠어요. ㅎㅎ 열심히 잘 들어보겠습니다.

    1. 하하, 목사님
      저는 65라고 썼습니다 🙂
      그나마 새 직장에 와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 파악이 안되어서 50시간 남짓 일하는 것 같아요.
      요즘 꽤 널럴한 직장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ㅎㅎ

      1. 72 아니면… 아직 제출 안 하신 80+라고 생각했는데… ㅋㅋㅋ 안식… 좋아요… 좋은 교회와 좋은 목사님… 늘 부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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