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희망이 없으면 자칫 잃지 말아야할 다른 것들을 함께 잃어버릴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내 ‘기독 청년’의 시기에,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살았다.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연구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키우며 보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하나의 축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희망들이었다.
(즉 기복주의적 희망, 인본주의적 희망들이었다. – 물론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한편 그런 왜곡된 희망들 때문에 나는 정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감으로써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희망이 왜곡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 왜곡된 희망 때문에 오히려 그 왜곡된 희망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는, 하나님께 죽어라고 붙어있었던,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었다.
내가 지금의 ‘기독청년’들을 보면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아니 기독청년만의 문제는 아니겠다. 그냥 이 세대의 문제이겠다.)
이들은 이제 그런 왜곡된 희망 조차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곡된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결국 그 왜곡을 발견하는 동인도 가지게 될텐데…
그저 그런 왜곡된 희망도 없으니 그저… 축 늘어진 젖은 빨래와 같이 그저 빨래줄에 매달려만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