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수) : 요한복음 13:19

요한복음 13:19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indicate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또, 요한복음은 어떤 내용을 찬찬히 설명을 해준다기 보다는 뜬금없은 선언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그렇게 ‘사랑’을 좋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나타나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다보면… 그 사랑에 대한 개념만으로 거의 다른 종교를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색다르게’ 느껴신다.
한가지 더. 요한복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공관복음서보다 더 personal하다.
공관복음이 서사적 역사적이라면 요한복음은 서정적 직관적이다.

그래서 나는 몇년전부터,
요즘 ‘젋은이’들에게는 공관복음적 예수 보다는 요한복음적 예수가 더 먹힐 수 있겠다고 주장을 해왔었다. ^^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데도…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복음의 예수가 좋다.

너무 직관적이고 심지어는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신앙을,
사랑과 인격이라는 매개로 개인적으로 만들어놓는 요한복음의 접근이 참 좋다.

요한이 풀어놓는 사랑의 예수가 정말 좋다.
왕으로서의 예수, 치유자로서의 예수, 혁명가, 선생으로서의 예수가 다 좋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가 정말 좋다.

그 예수의 사랑은 설명해내기 보다는 받아들여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일뿐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이어야 그 핵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신앙을 자꾸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려 하고,
신앙을 선동의 도구, 슬로건으로만 여기고,
신앙을 통해 다른 agenda를 이루려 하고,
신앙을 통해 사람들을 manipulate하고 있는,
현대에 흔히 보는 기독교에는 생명이 없다고 믿는다.

바로 그 사랑의 예수,
그 예수의 사랑이 극대화해서 드러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 십자가가 어떤 agenda를 이루었기 때문에 감격스럽기 보다는,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사랑의 표징이기 때문에 감격스럽다.

전혀 자격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통당하셨다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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