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6)

이것이 아주 일반적으로 맞아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충 생각하기에
– 부흥의 시기에는 대단한 양적 팽창이 이루어지고
– 침체의 시기에는 그 양적 팽창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다음 양적 팽창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축적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 많은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이 그렇다.
경기호황과 침체의 사이클이나, 엘니뇨와 라니냐의 사이클도 그렇다.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각하고 부르짖은 대로 침체의 시기에는 정말 제대로 망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깊어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2 thoughts on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6)”

  1. 한국/미국의 기독교도 그런 사이클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흥과 침체의 사이클을 지속해 나가려면 (=생존), 조직이나 현상이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는 내부의 가치가 남아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변화/자성시킬수 있는 내외부적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화의 역량이나 핵심가치가 없다면, 부흥과 침체의 사이클이 아니라, 쇠락과 소멸의 길로 갈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핵심가치,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내부역량이 남아 있을까요?

    한 10여년 전 성경공부에서 한분이 질문했습니다. “옛날에 조로아스터교가 완전히 성행(부흥)했다고 하는데, 지금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잖아요? 혹시 기독교도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때는 살짝 짜증이 났습니다. “뭔 이런 말도 안되는 질문을..”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성령께서 계신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뒤 몇가지를 더 주절거리고 넘어갔는데요. 요새는 최소 한국/미국 기독교는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얼핏 듭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침체의 기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 “깊어짐” 완전동의하구요. 동시에.
    침체의 기간에 공유되어야 하는 것 “절박함”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1. 네… 정말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우리 안에 어떤 힘이 남아있지 않을때 까지 무너져야만,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회복의 길이 열리지 않나 싶습니다.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주며 이 시기를 견뎌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참 많이 힘들게하는 사람들은 말씀하신 ‘절박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더 이해가 될텐데…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그 절박함의 눈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참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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