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us Update (17)

8월말 layoff 소식을 들었을때부터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다.
뭐 대단한 공로나 자랑거리라고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할만큼 내가 절박했었다.

정말 어떻게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공급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혜도, 용기도, 사랑도, 정의도, 내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명확했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바짝 말라버린 밭과 같은 내게,
살아갈 수 있는 생수를 조금씩 조금씩 공급해 주셨다.

말씀을 읽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에,
온갖 잡생각을 다 가진채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잠깐 그래도 기도하게 될때,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할때,
조깅을 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할때,
그리고 교회 예배시간 설교를 통해서,
나와 가까운 혹은 먼, 아니면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많은 공급들이 이루어졌다.

지난 주일 설교는 이번 layoff 기간에 내가 생각했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다시 정리하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몇천명이 모이는 말하자면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그 설교가 나만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건 비합리적이겠지만, (그리고 그 내용은 이 실리콘 밸리에서 매우 relevant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을 뒤통수가 띵~ 하게 맞게될 때에는,
마치 그게 화살처럼 내가 쏘아대는 것같이 느끼기도 한다.

Layoff를 맞이할 당시 나는,
하나님의 존재(existance)는 믿겠는데,
하나님의 임재(presence)가 잘 믿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내게 임재 하셨다.

Status Update (16)

10년전 layoff를 당했을때, 나는 참 많은 묵상을 했고 그로 인해 더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job을 찾았을때 그 기간을 통해서 내가 많이 고쳐지고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나,
이번에 layoff를 당했을때, 나는 많은 묵상과 성찰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job을 찾았을때, 여전히 그 병들어 있는 모습으로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막막함을 가지게 되었다.

3개월의 기간동안 회복이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내내 하나님께 많이 혼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은혜 없는 기독교,
내가 메시아가 되려고하는 믿음,
다른 이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주는 가르침…
그 속에서 나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 깊은 망가진 모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다시 job을 찾은 것이 감사하긴 하지만,
한편 두렵고, 혼란스럽고, 어색하다.

아마… 앞으로 적어도 몇년의 기간동안 많이 다루어지고 다듬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30여년전, 내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묻는다면 늘 갈라디아서 2:20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 믿음의 중심이,
이 갈라디아서 2:20이 다시 나의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되도록 좀 옮겨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Status Update (15)

그러면서 나는 내가 했던 성경공부들, 내가 스스로 썼던 묵상 노트들, 내가 했던 설교들,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한번 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많이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많이 위로를 받게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그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훨씬 더 기뻐했던 것 같다.

그저 무기력한 사람이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도움의 방법이 없을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 사람을 도와주시는 것은, 어떤 사람의 고귀한 헌신의 믿음보다 더 낮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이야기하는 이런 믿음은,
엘리트를 위한 믿음이 되는 경향이 컸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나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신앙을 세워나간 것 때문일 것 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할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소망이 아니라 절망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저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는 어떤 특권층을 위한 것이 믿음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서 다시 복기를 해보니,
내가 했던 강의 ,설교, 성경공부중 많은 것들은 어떤 이들에게 그런 좌절과 절망을 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나 스스로 functionally nonchristian으로 사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이들을 functional nonchristian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런 와중에 많은 좌절과 절망을 소개했던 것 같다.

Status Update (14)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감, 초조함, 분주함 그리고 매우 내게서 자주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만과 원망….
이 모든 내 삶속에서의 증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나는 내가 내 스스로의 메시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참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
내가 했던 참 특별한 경험들도 있었고, 내게 주어진 기회들, 또 내게 허락된 상황들…
그것으로 나는 참 많이 누리게 되었다.

그러니,
이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은 당연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메시아는 아니다.

세상은, 내 삶은, 내가 control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 무릎꿇고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 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layoff 기간중 큰 도움을 얻었던 것 중 하나는,
John Ortberg의 Become New 라는 youtube channel이다.
John Ortberg가 매일 하루 10분 남짓 되는 비디오를 올리는데 소위 spiritual formation이라고 불리우는 내용들을 주로 다룬다.

그곳에서 며칠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giving end이고 우리는 receiving end이다.”

우아… 정말 맞다! 그런데, 나는 마치 내가 하나님을 챙겨야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러니 벅차고 힘들 수 밖에.
그리고 여러 중압감, 불안감,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등이 넘쳐났던 것

Status Update (13)

이런 상황 속에서 내게 점점 굳어진 믿음은,
“내가 견뎌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정말, 내가 잘 견디고 해내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하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기독교 믿음의 핵심 가운데 핵심은, 내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다.

내 안에 해결책이 없었고, 구원이, 해결책이 우리 밖으로부터 (extra nos) 왔다는 것,
즉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기독교인으로 살겠다고 버둥거리고 모습 속에서 나는 점점…
functionally 비기독교인으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control하고,
내가 뭔가를 해야한다는 부당한 부담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가 지는 십가가로 나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로 부터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는 기능적으로 비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것이 나를 좀먹어 내가 많이 망가진 상태에 놓여있게 되었다.

Status Update (12)

가만 생각해보면,
소위 내게 ‘상담’이라는걸 해오는 사람들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내가 알았던, 여기 저기에서 만났던 청년들, 그리고 청년시절에 만났지만 지금은 장년이 된 사람들이 꽤 있다.
어쨌든 내가 이렇게 저렇게 적어도 몇달 이상 성경공부를 함께 했거나 조금 더 깊게 멘토링을 했던 사람들을 모두 헤아려보면 최소한 수백명일거다. .

그저 어디 한번 수련회 가서 한번 만났던 사람들까지 하면 물론 더 많을 거고.

그런데 그중 몇년만에 연락을 해서 내게 소위 면담 혹은 상담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이 와서 내게 하는 이야기들은 꽤 무겁다.
신앙을 떠나기 직전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이혼/파혼을 앞두고 연락을 하는 사람들, 심각한 건강의 문제, 재정적 어려움, 직장에서의 어려움 등등…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연락을 해온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지혜가 풍성하지도 않다.
경험이 다방면에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랑이 많지도 않다.
그런데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절박한 상황을 가지고 나와 이야기하겠다고 연락을 해오면…
그 무게가 말로 다 하기 힘들다.

그냥 내가 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는 것 같다

Status Update (11)

그렇게 살면서 당연히 힘들었다.
처음엔 길을 걸어가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러나 점차 그것이 내 lifestyle 자체가 되었고 그저 힘든 것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 내 부르심이려니…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정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치열함이 삶속에서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빈 구멍을 내가 여기 저기에서 때우면서 살아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게 기독교인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는데, 이런 lifestyle은 회사생활에서도 이어졌다.
사람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그걸 해야하면 나는 내가 뛰어들어서 그걸 했던 일들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걸 쉽게 확~ 놓아버리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내가 지고 있는 짐들이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나서 나를 납치해가면 과연 이걸 누가 대치할까?

뭐 회사야…. 나 아니어도 결국 어떻게든 누가 하겠지.
그런데… 기독교 ministry는 그렇지 않은 거다.
정말 사람도 없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이 이 짐을 나누어지기 어려워 보이는거다.
이거 그냥 몰라라 하고나니… 결국 후배들 힘들어 어려워 지는거 보지 않았나.

사실 회사도 그렇다. 회사에서 이런식으로 일을 하다보니, 사람들이 내가 한 일을 별로 많이 잘 알아주지는 않고 회사일은 많이 힘들게하고… 그런 상황이 계속 되었다.

그냥 상황이 그랬다. 그냥 내가 지고 있는 무게가 너무 힘들고 무거웠다.

Status Update (10)

돌이켜보면,
내가 대충 대학원을 들어가던 시절부터,
정말 이를 악물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참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정말 시간이 부족했다.
20대에는 정말 시간이 부족해서 잠을 줄여가며 성경공부를 했다.
20대 중후반 이후 하루 5시간 정도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짜낸 남는 시간으로 성경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며 공부도 했고, 여러가지 ‘사역’도 했다.
아니, 하루 12~15시간씩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내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하는게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할 수 있는 방법이 그야말로 몸을 갈아내어가며 잠을 줄여가며 살아가는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그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낙오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그 치열함이 더해졌다.

그것 뿐 아니라,
내가 연관되어있던 몇가지 ministry에서도 정말 피하기 어려운 공식적, 비공식적 책임들이 내게 지워졌다.
어떤땐 그것들이 너무 힘들고 부담스러워서 잠수를 타보려고 하기도 했고,
어떻게든 후배들에게 다 넘겨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후배들만 더 많이 어렵게 되어버리는 것 같은 모습이 만들어 졌다.

결국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 어떻게든 내가 버티고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그래도 좀 더 버텨야 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대충 대학교 4학년때 혹은 한국에서 대학원 1학년때부터는 내가 스스로를 ‘평신도 사역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저 그런 많은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내 부르심이려니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냥… 삶이 힘들었고,
그 힘든 삶은 지탱해내는 방법이 더 버텨가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버텨야 했던 것이었다.

Status Update (9)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나름 성경을 읽고, 책을 읽고, 성찰을 하고, 기도를 하는 시간을 확보했다.
시간이 그래도 많이 남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루에 적어도 2-3시간 이상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게 늘 쉬웠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내 안에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도움이 필요했다.
나를 건져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손을 뻗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가장 깊게 발견한 것은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발견하도록 해주신 것은)
나는, 내가 control하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control을 놓으면 하나님께서도 일하시기를 멈추실것 같은 불안감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짧은 문장으로 쓰자니 그러려니 싶은데,
막상 이렇게 말로 쓰도록 정리되기 까지는 적어도 2달 정도가 걸렸다.
조금씩 조금씩 내 망가진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망가진 모습들을 다 모았을때 결국 내가 control하고 있는, 그래서 은혜가 없는 realm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Status Update (8)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고민하는 것이 가장 내게 필요한 것일까?

여러가지를 생각하다가…
내게 정말 부족한 그리고 필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은혜’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게 슬쩍 찌르셨던 것 같다. (He nudged me)

도대체 그럼 내가 어디서 은혜를 다시 깊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은혜의 개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과연 내게 의미 있는 은혜라는 것을 어떻게 다시 재발견할 수 있을까?

은혜에 대해서 내가 읽은 책들중에 가장 방대하고 여러웠던 책은 Paul and the Gift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었다.
그 은혜가 과연 내게 의미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서를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아마 지난 3개월여동안 로마서를 한 100번쯤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권의 책들을 다시 읽었다.
피터 엔즈의 확신의 죄,
박영선의 하나님의 열심,
찰스 스윈돌의 은혜의 각성
같은 책들.

하나님의 열심이나 은혜의 각성은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 다닐때 읽었던 책들이니, 읽은지 거의 30년 만에 다시 읽은 것이다.

그리고 로렌 커닝햄의 책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벼랑끝에 서는 용기… ) 등을 읽으려 했으나, 그 책을 주문해서 읽기 전에 job을 찾았고, 다시 바빠져서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조만간 다시 한번 읽어보려 한다.)

이런 책들은, 내 20대 초반에 읽었던 책들이고,
어쩌면 그로부터 진화해온 내 신앙의 여정 속에서 어느새 좀 많이 잊혀진 스타일의 신앙이 담긴 책들이다.
그리고 사실 이제는 살짝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도 있기도 하고.

그러나… 이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내가 혹시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린 그러나 잊으면 안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이 책들중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은 특히 내게 다시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책에서 살짝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이제는 있지만, 그럼에도 박영선 목사님이 그 책에서 하고자 하는 그 이야기들은 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잊어버린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