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Evil

악(Evil)의 존재에 대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naive한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람들 안에 있는 악 – 특히 악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그리고 내게서 발견하는 악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악도 분명한듯 하다.

그런 여러가지 악에 사람은, 적어도 나는 너무나도 아무런 힘이 없다.
나는 인간이, 인류가 그 악에 붙들려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악에 대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십자가에서 모든 악이 나름대로 최고로 힘을 모아서 모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악의 공격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다 받아내셨다.
그 모든 악에게 처절하게 살해당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악에대한 승리를 이루셨다.


고난주간 묵상 – 은혜

Tim Keller 설교중 매우 깊게 내게 남은 이야기.
(detail은 조금 틀릴 수도 있겠다)

비기독교인인 어떤 사람이 Tim Keller에게 기독교가 불편한 이유 한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신과 일종의 ‘거래’가 가능한 것이라면,
내가 헌신한 만큼 신에게서 복이 오는 관계라면,
내가 그 신에게 어디까지 헌신해야하는가 하는 기준이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이 일방적으로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는 종교이다보니,
일단 그 신과의 관계를 맺고나면 그 신 역시, 자신에게 무한정 요구할 수 있게될 것 같다는 말.

다시 말하면, 신으로부터의 은혜가 무한정이니,
자신의 헌신도 무한정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기독교가 불편하다고.

John Barclay의 Paul and the Gift의 내용을 이렇게 현실에서 잘 설명한 예가 있을까싶다.

나는 내가 복음에 조금 눈을 뜨게 되었을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은혜’라는 개념이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던 내게,
그런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 은혜는 여전히 내게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은혜는 내 삶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고, 지금도 흔들고 있다.

은혜는 정말 비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고난주간 묵상 – 시험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이후에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이겨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는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예수님때문에 이제 나 같은 사람도,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

십자가의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고난주간 묵상 – 구속 (Redemption)

Penal substitution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한동안은 penal substitution 없이 십자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
penal substitution 없는 믿음을 나름 거의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나를 사셨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20대에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penal substitution을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이 내게 새 생명을 주셨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내가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살면서 내 죄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게 사는 시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궁극적으로 이걸 해결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명백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외에 내 망할놈의 삶을 회생시킬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그렇게 나를 사셨다. 핏값을 주고.

이것이 얼마나 불편하든 간에,
이것을 피할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