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실패

나는 start-up company의 founding member로 일했던 경험도 있고,
교회 개척에 참여해서 도왔던 경험도 있다.
그 외에도 학교나 직장, 지역에서 성경공부를 만들어서 만들었던 경험도 있고, system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에 들어가서 system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일도 있다.

그중 대다수는 실패했고, 그중 일부는 그나마 약간 성공했다.
실패한 시도들 가운데에도 어떤 것은 절망적이었지만 어떤 것은 그 이후에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있었다.

가령,
예전에 교회개척에 참여했지만 그 이후에 흐지부지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많이 실망했고, 답답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 일이 실패한 이유가 그때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 때문이 아니었고,
원인이 리더중 한 사람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나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관여한 시도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이 사람들이 다른 기회에 비슷한 시도를 한다면 성공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 실패들을 돌이켜보니,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실패들은 분명히 긍정적 실패, 혹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실패였다.

시편 10편

12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 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
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14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15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16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
이방 나라들은 주님의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17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18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오늘 점심은 파를 넣은 파면이다.

풍요와 편리함

내 기억으로 대략 15년쯤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를 사면 그 수명이 한 5년정도였다.
그러니 1~2년 지난 모델을 사는 일을 그렇게 흔하지 않았고 꽤 큰 돈을 주고 사더라도 3년정도 지나면 뭔가 버벅거린다는 느낌이 나곤 했다.

스마트폰도 그렇다.
처음 스마트폰이 나왔을때는 한 2년정도마다 바꾸지 않으면 원하는 기능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았고, 아주 오래쓰면 3년정도 쓸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내가 쓰는 컴퓨터중에서 6~7년 된것도 있는데, 아주 쌩쌩하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도 한동안 쓸 것 같다.

요즘 나는 스마트폰을 살때 최신모델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1~2년 지난 모델을 산다. 그래도 충분히 빠르고,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대신 가격은 절반가격 수준으로 살 수 있으니 아주 이익이다.

기술이 많이 발전하니 최고의 물건을 사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문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함과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냥 대부분의 웬만한 사람들은 그 최고의 풍족함과 편리함이 아니더라도 대충 살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1~2년 지난 스마트폰을 사서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처럼,
남들이 다 누리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냥 삶은 이미 충분히 편하고 풍요로운 것이 아닐까.

꼭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괜히 남들이 다 하니까 최신모델 스마트폰을 사는 것처럼,
나도 내 삶의 풍요와 편리함이 꼭 필요하지 않은데 그냥 괜히 흐름에 휩쓸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 많지 않을까.

Help!

지난주,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일종의 ‘도움’을 요청해왔다.
자기 친구들중 이제 막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 하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는데 그 친구와도 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래서 다 함께 zoom 미팅을 잡았고, 어제 밤에는 그 분들이 질문하고 내가 나름대로 대답을 해주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동부에 사는 4명의, 30대의 여성들이었다.
질문은, 기독교에대해 조금이라고 비판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고, 또 비기독교적 문화에서 살다가 이제 막 30대에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된 사람이라면 또 궁금해할만한 것들이었다.
한 90분 정도 몇가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주는 시간을 보냈는데, 했던 몇가지 생각은 이렇다.

  1.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내가 드는 생각은, 어떤 부류의 교회들이 버린 쓰레기통을 내가 청소하는 것 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특정 교회들이 벌이는 엽기적인 종교행위에 완전히 질색을 하게 되었고,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는 하소연을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나름대로 내가 대답도 하고, 오해도 풀어주지만, 그런 대형교회들이 커다란 쓰레기더미를 트럭으로 가지고와서 이런 사람들 위에 쏟아놓고 있고, 나는 그 사람들 위에 떨어진 쓰레기를 일일히 손으로 걷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2. 실제 이런 분들과 대화를 해보면, 별것 아는 대답에도 참 고마워한다. 어쨌든 기독교에 관심도 있고, 믿어보고 싶기도 한데, 도대체 현대의 기독교를 보면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또 그런 기독교의 일부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럴때 그런 오해들을 좀 풀어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오히려 오래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보다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시간을 쓰는 것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뭘 하더라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대비가 된다.
  3. 예수님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그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전달할때 사람들에게 정말 매력적이다. 기독교의 바운더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예수님에 대해 더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어떤 잡다한 변증이나 설명이나 대답보다더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게 대화한 몇 분들에게는 내 이메일과 카톡 등을 알려주었고, 언제든 더 질문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라고 해 주었다.

만우절

나는 만우절 장난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멋진 만우절 농담/장난을 보면 매우 재미있어 한다.
물론 내가 장난을 하는 대상은 내 아내와 민우.
민우는 속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아내는 잘 속는 편이다.

그런데,
금년엔 영 장난을 칠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냥 세상이 무겁고 어둡게 느껴진다.
내 마음도 무겁고, 여러가지로 눌리고 힘이든다.

그러나,
그럴때 더 멋진 만우절 농담/장난을 하는 것이 멋지게 이 상황을 살아가는 것일텐데…
전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힘들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때는,
창의적이고 반짝이는 유머라는 재능이 참 필요한 것 같다.

생일선물

어제 예배시간에 들었던 설교는 정말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결국 복음은, 내가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라는 이야기.

젋은 부자관원의 마태복음 본문이었고,
실리콘 밸리의 문화와 대비되는 복음 이야기를 했는데,
아… 정말 내 마음에 깊게 찔렸다.

그리고나서 불렀던 찬양은 Bless God.

내겐 참 소중한 생일선물이었다.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

… 그녀에 따르면 고통(pain)은 사건의 경험이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를 인식하고 명명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경험은 무언가 다른 것, 즉 힘이나 앎이나 행동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괴로움(suffering)은 인식하지 못한 고통(pain), 소화되지 않은 고통(pain)이 되살아나는 일종의 악몽입니다. 고통(pain)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 사람들은 그 고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힘, 고통(pain)을 넘어서는 운동을 촉진하는 힘을 박탈당합니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가 고통(pain)을 촉발할 때마다 그 고통(pain)이 반복되도록 자신을 정죄하지요. 이를 벗아날 수 없는 괴로움(suffering)의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 고통(pain)을 설명하려고만 하는 신앙, 사람들이 고통(pain)을 나누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앙, 고통(pain)이라는 파괴적인 공포를 극복하는 데 힘이 되지 않는 신앙은 피상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를 깊은 고뇌의 길, 황폐함을 겪는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마주했을 때 그러한 믿음은 결핍을 일으키며,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본회퍼는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 하며, 그 잔인함과 고통은 견딜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영감을 주며, 그들을 위로하고 변화시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그들으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말입니다. 병들고 가난한 무수한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삶과 희망의 원천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중 두번째 글 “그의 상처를 통해 우리는 치유되었다” 에서

진짜 모르는 일이다….

1.
나는 소위 일반적인 ‘대학입시’라는 것을 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대학에 갈때 우리 학교는 따로 시험을 보았는데,
국어 100점
영어 100점
수학 300점
물리 150점
화학 75점
생물75점
총 800점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합격선이 대충 400점 대였으니 문제가 꽤 어려웠던 셈이다.
나는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할때 생물은 사실상 거의 포기했었다. 그냥 학교에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봤던 것 이외에 따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 생물이 배점이 높지 않으니 그렇게 해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의료기기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의료용어들을 들으면 여전히 잘 못알아 듣는 일이 많은데….
나는 진짜 생물에 관한한 무식한데… 여기서 이렇게 하고 있다.

2.
대학때 우리는 아무 전공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일찌감치 제낀 몇개의 전공이 있었는데,
화학과, 화학공학과, 생물학과 등이었다.
주된 이유는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를 하기 싫어서였다.
너무 복잡하고 외는게 많다고 생각했고 나는 일찌감치 그쪽으로는 생각을 딱 접었다.

지금 나는 여러가지 polymer(고분자) 재료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많은 유기화학 관련한 정보들을 만나고 있다.
아…이럴거면 일찌감치 좀 더 관심같고 공부더 할껄…

3.
나는 자그마치 ‘플라즈마’라는 것으로 박사를 받았다.
나름 그거 하면서 재미도 있었고, 나중엔 꽤 열심히 했다.
심지어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혼자 재미있어서 그쪽 자료들을 더 공부하기 까지 했었다.
지금 나는 플라즈마에 관련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했고, 재미있게 하기도 했는데,
지금 나는 완전 다른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진짜 사람일 모르는 거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가 별로 관심 없거나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에도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하나… 그런생각도 해본다.
이미 나는 나이가 많으니 그런 걱정 안해도 되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지난 토요일,
긴 하루를 마치고 밤에 ㄱㄷㅇ 간사님과 둘이 대화를 조금 나눌 기회를 얻었다.

나는 그 전 이틀동안 연속으로 3~4시간씩 밖에 자지 못했고,
토요일 하루 종일 온힘을 다해 쏟아부었기 때문에 나름 많이 피곤했었는데도,
자정이 거의 되도록 꽤 알차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것도 둘이 내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ㅠㅠ

나는 내가 느끼는 일종의 무력감이랄까… 패배감이랄까… 그런 것들을 주로 이야기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것이 적어도 내 생각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모태부터 교회를 다니고,
20대 초반에는 나름 매우 심한(?) 회심경험도 했고,
그 이후 지난 35년여의 시간을 정말 열심히 예수님 믿으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모든 순간 완벽하게 훌륭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예수님 사랑하면서 살기위해서 많이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이런 의문들이 가득하다.
그렇게 했던 내 삶의 결과와 열매들은 그저 너무 초라한 것 같고,
내 노력은 정말 합당한 것이었을까,
혹시 그저 나 혼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냥 열심히 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했던 노력들이 오히려 부작용만 큰, 잘못된 노력들은 아니었을까,
나로 인해서 예수님을 더 잘 바라보게 된 사람이 정말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울 주어서 그 사람이 나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을 바라는 내 꿈은 것된 것일까…

ㄱㄷㅇ 간사님께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었는데,
ㄱㄷㅇ 간사님으로부터의 대답은 꽤 단순했다.
그저 내가 할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해주시면 되는거고, 안해주시면 어쩔수 없는 거라고.
정말 내가 하는 일들이 합당한 것이었을까 하는 것을 판단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한것이 아니겠느냐고.

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혹시 일종의 무책임함은 아니냐고 물었고,
ㄱㄷㅇ 간사님은 그걸 알수는 없다고 하셨다.

괜히 내가 해도 소용없는 생각들을 해가며 머리와 마음과 가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차피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어떻게하실지는 내 control 밖에 있으니…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ㄱㄷㅇ 간사님의 말씀에 완전히 설득되지는 않았지만,
내 머리 속에 꽤 깊게 대화가 남아있다.

일종의… 자책감

지난 주말, 매우 정신없이 보냈다.
토요일 세번의 90분 짜리 성경공부 세션 인도,
주일 한 한인교회에서,
아침 주로 어른들을 위한 ‘세상속의 하나님 백성’에 대한 세미나,
그 후에 청년부 설교,
그 후에 청년부를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

준비하느라 나름 고민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문제는 이렇게 하고나면 나는 늘 깊은 자책감 같은 것에 빠지곤 한다.
많은 경우 내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면서 아… 그때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식의 자책을 많이 하게 된다.

당연히 이번에도 많은 세션을 이틀동안 정신없이 해야 했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쏟어져들어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