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부재

Bottom-up의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리더십은,
Top-down의 의사소통 중심의 리더십보다 훨씬 더 어렵다.

Bottom-up을 정말 제대로 하는 리더는,
자신이 뛰어나게 할 수 있는 Top-down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오히려 건강한 방향을 운전해내는 사람이다.

Top-down이 자신없으니 나는 Bottom-up만 하겠다는 리더는 그냥 게으르거나 무능한거다.
혹은 자발성이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중요하게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리더는 그 자격이 부족한거다.

그런데…
정말…
아주 가끔은…
그런 무능하거나 게으른 리더 아래에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그 조직을 구해내고, 자신이 놀라운 리더로 선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5)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해,
정신병, 치매, 불치병 같은 심각한 질병들,
아주 깊고 깊은 인간관계의 갈등,
헤어나오기 어려워보이는 경제적 어려움…

무엇이 되었건 간에,
많은 노력을 통해서 그것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매우 정당하면서도 건강하다.

그렇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그냥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필요할 수 있다.

이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 수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4)

예전에 Tim Keller가 어떤 설교에서 한 예화.

교회에서 전쟁으로 엉망이 된 어떤 나라에 정신과 의사들을 봉사단으로 보냈다고 한다.
아마 전쟁이 있었고,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사람들을 돕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막상 그 정신과 의사들이 갔다가 거의 대부분 그냥 돌아왔다고.
막상 갔더니, 그 사람들의 상황을 끔찍하고 비참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어떤 정신적인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였단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닌데, 도저히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

나는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사는 매우 중요한 팁을 그곳에서 얻었다.
그것은, 망가진 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서구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뭔가 내게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어떤 사람을 고소하기도 하고, 많은 돈과 자원을 들여서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그것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무너져있는 어떤 것들을 그저…
그러려니… 이것이 내 삶의 일부이려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사는 팁이 아닐까 싶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3)

망가진 세상을 살때 흔히 하는 일은,
그 망가진 것에 눈을 감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게 꽤 잘 먹힌다.
다만, 그렇게 눈을 감고 회피하지 못할만큼 그 망가진 것이 내게 고통으로 다가오기 전 까지는.

갑작스러운 사고,자연재해 등과 같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문제로부터,
인간관계의 문제, 심각한 질병, 경제적 문제 등과 같이 내가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닥치면 그것을 감당하기 너무 힘든 문제 등은 결국 어떻게든 나로 하여금 이 ‘깨어진 세상’을 해석하라는 압박을 가한다.
아주 무지막지한 압박이다.

그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문제를 감싸고 있는 전체 frame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때도 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맞닥드려야하는 숙제인 듯 하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2)

내가 어릴때 생각했던 것 같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늘 현실이 아니라는 깨달으면서 정말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대충 대학을 마칠때쯤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방황’도 했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동안,
나는 연구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뭐 학과 공부는 그냥 하던대로 수업듣고 시험보면 무리하지 않고 잘 할 수 있었지만,
실제 시간을 들이고 생각을 쏟아야하는 연구에는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았다.

실험실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하긴 하는데,
정말 억지로 하는 일이었고,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적극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연구를 하는 일들은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

망가진 세상을 해석해 낼 수 없었던 나의 유치함 때문이었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1)

나는 그래도 어릴때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커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그렇게 열심히 살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정직하고 착하게 살면 내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나는 꽤 나이가 들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꿈이 그냥 유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30대가 들어서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세상의 아픔에 대한 지적 동의는 있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일부라고 인식하면서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왜 내게 이런 일이?’ 라고 이야기할만한 것들을 만나면
놀라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여전히 10살짜리 어린아이의 순진하면서 유치한 생각으로부터 충분히 자라지 못한 것 같다.

욥기

요즘 매일 성경의 묵상 본문이 욥기다.
욥기는 내가 꽤 여러번 도전했는데, 매번 뭔가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들게 읽는 것을 실패해온 책이다.

뭐 내용도 대충 알고 있고,
그 욥기를 해석하는 설명도 많이 들었고,
혼자서 그걸 읽기도 했지만…

뭐랄까…
나는 아직 욥기의 ‘맛’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주 초,
전혀 뜬금 없이 한국에서 어떤 분이 내게 자신이 욥기 자료들을 정리했다면서 보내주셨다.
뜨금.

아니… 내가 설렁설렁 하고 있다는걸 그분은 어찌 아셨는지.

바짝 다시 긴장하고 욥기를 읽는데…
그냥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고기를 씹는데, 씹는 질감만 있고 그 맛은 느끼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I want to see Jesus

그냥…
정말 뜬금없이…
무작정 예수님을 정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정말 그렇다.

물론 내 삶이 힘들거나 어려운 문제 가운데 있을때도 그렇지만,
그냥 아무런 일이 없는데도 무작정 예수님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주 나이 많은 분들에 비하면 나야 아직 애송이일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때가 그래도 꽤 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나서,
휴우…. 힘든데… 아… 예수님 만나고 싶다.

이게 뭐 죽고싶다는 염세적 생각인건 아니다.

그냥 예수님이 보고 싶은거다.

어제밤엔 정말 그렇게 예수님이 보고 싶었다.
마음에 여러가지 무거운 것을 안고… 예수님을 보고 싶었다.

성경공부에 쓰는 시간

나는 온라인 성경공부를 하면, 그 내용을 녹화해서 youtube에 올리고, 참석한 사람들끼리 다시 볼 수 있도록 해놓는 편이다.
그러니 매주 성경공부를 하면 계속해서 video가 쌓여가게 된다.

대충 2020년 여름부터 온라인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계속 녹화된 영상들이 쌓여가고 있는데…
이번주로 320개정도의 비디오가 벌써 올라가 있다.
모든 비디오는 다 참석한 사람들끼리 보도록 했고, 그러니 모두 unlisted로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서 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러니 비디오의 view 수는 적은 것은 2~3번되는 것도 있고, 대부분이 10번 정도이다.
그 와중에 드물게 100번 이상 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분명 참석한 누군가가 그룹 밖으로 흘렸던 것이 분명하다. ^^

3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300개가 조금 넘는 영상이 올라갔으니,
1년에 평균 100개정도 올렸다는 얘기인데…
보통 성경공부한번에 90분 정도 되니까, 1년에 150시간 정도 온라인 성경공부를 해왔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물론 그 성경공부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내 생각에 평균 한주에 3~5시간 정도는 되니까… 실제 성경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은 1년 150시간보다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짜게 잡아서 성경공부준비에 역시 1년동안 150시간 들였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1년에 300시간정도는 성경공부 준비와 성경공부에 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루에 자고, 밥먹고, 씻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 쓰는 시간이 9시간.
일하는 시간을 대충 10시간 잡으면,
한주에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시간 9시간 x 7일 = 63시간/week
한주에 일하는데 쓰는 시간 10시간 x 5일 = 50시간 /week
한주 전체 시간은 24시간 x 7일 = 168시간 / week
한주동안 내 ‘free time’은 55시간.
대충 일년을 52주로 잡으면 일년동안 내 free time은 2860시간

그러니까, 내가 성경공부와 그것을 위한 준비에 쓰는 내 시간은,
내 전체 free time 2860시간중 300시간.
내 ‘free time’의 대략 10% 정도를 쓰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음… 계산해보면 그렇게 많이 시간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네.
그런데 왜 이렇게 성경공부준비와 성경공부에 쓰는 시간이 많다고 느껴질까.

뭔가 계산에 잘못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풀어져서 시간을 막 쓰고 있는 걸까.

요리

요리사들이 있었다.
A 요리사는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요리를 하는데, 영 맛이 이상했다.
간도 잘 맞지 않고, 양념과 재료가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B 요리사는 그냥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후다닥 모아서 간단한 양념을 해서 금방 뭔가를 만들어 내는데, 그게 늘 엄청난 대작 요리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늘 그래도 맛이 있었다.
간도 잘 맞고, 음식 재료에 맞는 양념을 효과적으로 잘 했다.

A 요리사는 전문 요리학원에서 나름 제대로 교육을 받았지만
B 요리사는 혼자서 라면을 끓여먹다가 조금씩 서바이벌 요리를 배웠다.

B 요리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전문 요리학원에서 배웠는데 어떻게 A 요리사가 한 음식은 가장 기본적인 간도 맞지 않는 것일까.

A 요리사는 자신의 요리가 간이 맞는다고 주장을 했다.
그렇지만 먹는 사람들마다 간이 이상하다고 다 한마디씩 했다

….

여기서 가능성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요리라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어서 아무나 잘 할 수 없는 것인데, B 요리사는 그냥 천재여서 요리를 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요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A 요리사가 비록 전문 요리학원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은 요리의 아주 기본도 잘 알지 못한채 자격증만 받은것이라는 것이고, B 요리사는 그냥 음식을 하는 아주 기본적인 간 맞추기, 재료 잘 준비하기 등에 충실하기 때문에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

기독교를 믿는 신앙도 가끔 이렇게 생각되기도 한다.
소위 ‘좋은 교회’출신이라거나, 무슨 무슨 훈련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거나, 심지어는 신학교 그것도 좋은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는 사람중에…
신앙의 기본적인 맛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뭐 다녔던 교회도 그냥 시골의 작은 교회이고, 뭐 어디서 변변한 훈련이랄까 그런거 받지도 못했고, 그냥 혼자서 하나님 사랑하면서 나름대로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해가며, 기도해가며, 그렇게 살았던 사람중…
그 사람의 신앙의 맛이 정말 카아~ 하고 감탄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건…기독교 신앙이 어려운데 시골교회 출신이 신앙에 있어서 무슨 천재여서 그런걸까,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당연히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좋은 교회’ 출신의 신학교 졸업한 사람이 신앙의 기본을 모르기 때문인 것일까.

나는 당연히,
기독교 신앙이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려한 신앙 경력에 맞지 않는 신앙의 기본기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는 ‘천재’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신앙에 더 특출난 재주가 있는 것 같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신앙의 기본이 없음을 감추려는 사람은… 참 비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