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동이 있음을 느낀다. ‘서른 세 살의 젊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아가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을 가져온다. 사실 그 것을 그냥 감동이라고 표현하자면, 어쩐지 그것을 너무 폄하(貶下)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요즈음 청년부의 모임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열정이 식었다는 말도 들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기도가 부족하다, 말씀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여러 지체들의 사랑 가득한 충고와 해결책들도 자주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모임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 청년부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20년,
3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치를 순식간에 포기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열정과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어느 지체의 말대로 그야말로 매주 금요일이 수련회가 되는 모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에 걸맞는 자유, 평화, 화평, 사랑, 안정감 등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이전에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하덕규 집사의 ‘자유’의 가사가 과연 우리에게도 풍성하게 느껴지는가? 오히려 해야할 일들만 더 늘어난 채 ‘종교생활’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소모적인 일인가?

우리 청년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유대주의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모습에서 제하여 나갔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성경에 대한 통찰력 없이 나름대로 ‘말씀을 적용’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도저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일 길을 여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이 곳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주관적 ‘느낌’이 자칫 성경의 계시적 증거를 묻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그 말씀을 우리 모임에 잘 적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바로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다. 멋있는 피아노와 최고의 연주자와 영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면 그 곳에 계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까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본다.
찬양을 할 때에도 분위기에 맞추어 곡을 골라야 하고, 가능하면 인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더욱 감동이 된다. 피아노 반주자는 최고의 솜씨로 연주를 하고 선곡된 찬양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고 가끔은 통성 기도를 하는 시간과 묵상기도를 하는 시간을 두어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절대로 찬양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찬양을 매우 좋아하고, 특히 우리 청년부의 찬양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목사님의 message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야하고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은혜가 된다’. (이것도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런 message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우리
목사님의 message가 정말 이런 message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필자 개인 영성의 부족으로 자칫 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공부 조장은 충분히 준비를 해와서 모르는 것을 대답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시간을 주어야 역시 ‘은혜를 받는다.’ 기도는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몇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뻥뻥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주어야 나도 ‘은혜를 받아 기도가 트인다.’
만일 위에 열거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필수 요건이라면 우리는 중국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중국 오지의 선교사님들이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을 훨씬 더 앞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상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내려져야 하고 잊혀져야 한다. ‘세상 학문’을 보다보면 믿음이 떨어지기 쉽고 은혜를 막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이성에 관계없이 믿는 대상이므로 나는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과연 ‘고지를 정복하는’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우리 청년부가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기 받은 은사에 따라서는 중국, 아프리카, 일본, 무슬림 지역에서 진정한 대안적 기독 지성이 길러지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말씀의 깊이’와 ‘훈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말씀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그 감격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의 깊이 없이 성경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얻는 감동이 ‘물방개점’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자극을 받으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핵심과 근본에 대한 바른 통찰력 없이 매우 ‘자극적인 것’만을 구하다보면 자칫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게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감격과 열정이 충분히 표출되어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좀 더 말씀의 깊이와 훈련에 몰두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성장의 수단이지만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하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세워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의 모임을 ‘느끼는’ 모임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찾는 것과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난 1월호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을 지내신 KAIST 윤완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 믿음을 강조하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한 열심
– 구원을 강조하되 그것만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 목적 없는 신앙
– 하나님께서 우주 대신에 교회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 편협함
–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 가두고 성공의 이념으로 나머지를 채우는 이원론적 신앙
– 순종보다는 제사를 드리려는 제사 종교
–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성경 공부
– 순종하려 하면서 계시를 묻지 않는 어두움
– 계명은 없고 사명만 있는 청년적 신앙
– 바울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와서 들어도 감탄할 오묘한 해석
– 감격으로 시작하지 않는 윤리,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
– 정열에 들떠 방향을 잃은 사람들, 방향을 잡느라 정열을 잃은 사람들

* 구체적인 이야기가 후에 더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1부)라고 제목 뒤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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