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동이 있음을 느낀다. ‘서른 세 살의 젊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아가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을 가져온다. 사실 그 것을 그냥 감동이라고 표현하자면, 어쩐지 그것을 너무 폄하(貶下)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요즈음 청년부의 모임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열정이 식었다는 말도 들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기도가 부족하다, 말씀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여러 지체들의 사랑 가득한 충고와 해결책들도 자주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모임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 청년부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20년,
3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치를 순식간에 포기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열정과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어느 지체의 말대로 그야말로 매주 금요일이 수련회가 되는 모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에 걸맞는 자유, 평화, 화평, 사랑, 안정감 등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이전에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하덕규 집사의 ‘자유’의 가사가 과연 우리에게도 풍성하게 느껴지는가? 오히려 해야할 일들만 더 늘어난 채 ‘종교생활’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소모적인 일인가?

우리 청년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유대주의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모습에서 제하여 나갔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성경에 대한 통찰력 없이 나름대로 ‘말씀을 적용’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도저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일 길을 여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이 곳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주관적 ‘느낌’이 자칫 성경의 계시적 증거를 묻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그 말씀을 우리 모임에 잘 적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바로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다. 멋있는 피아노와 최고의 연주자와 영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면 그 곳에 계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까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본다.
찬양을 할 때에도 분위기에 맞추어 곡을 골라야 하고, 가능하면 인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더욱 감동이 된다. 피아노 반주자는 최고의 솜씨로 연주를 하고 선곡된 찬양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고 가끔은 통성 기도를 하는 시간과 묵상기도를 하는 시간을 두어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절대로 찬양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찬양을 매우 좋아하고, 특히 우리 청년부의 찬양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목사님의 message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야하고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은혜가 된다’. (이것도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런 message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우리
목사님의 message가 정말 이런 message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필자 개인 영성의 부족으로 자칫 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공부 조장은 충분히 준비를 해와서 모르는 것을 대답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시간을 주어야 역시 ‘은혜를 받는다.’ 기도는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몇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뻥뻥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주어야 나도 ‘은혜를 받아 기도가 트인다.’
만일 위에 열거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필수 요건이라면 우리는 중국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중국 오지의 선교사님들이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을 훨씬 더 앞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상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내려져야 하고 잊혀져야 한다. ‘세상 학문’을 보다보면 믿음이 떨어지기 쉽고 은혜를 막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이성에 관계없이 믿는 대상이므로 나는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과연 ‘고지를 정복하는’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우리 청년부가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기 받은 은사에 따라서는 중국, 아프리카, 일본, 무슬림 지역에서 진정한 대안적 기독 지성이 길러지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말씀의 깊이’와 ‘훈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말씀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그 감격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의 깊이 없이 성경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얻는 감동이 ‘물방개점’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자극을 받으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핵심과 근본에 대한 바른 통찰력 없이 매우 ‘자극적인 것’만을 구하다보면 자칫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게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감격과 열정이 충분히 표출되어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좀 더 말씀의 깊이와 훈련에 몰두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성장의 수단이지만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하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세워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의 모임을 ‘느끼는’ 모임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찾는 것과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난 1월호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을 지내신 KAIST 윤완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 믿음을 강조하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한 열심
– 구원을 강조하되 그것만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 목적 없는 신앙
– 하나님께서 우주 대신에 교회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 편협함
–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 가두고 성공의 이념으로 나머지를 채우는 이원론적 신앙
– 순종보다는 제사를 드리려는 제사 종교
–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성경 공부
– 순종하려 하면서 계시를 묻지 않는 어두움
– 계명은 없고 사명만 있는 청년적 신앙
– 바울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와서 들어도 감탄할 오묘한 해석
– 감격으로 시작하지 않는 윤리,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
– 정열에 들떠 방향을 잃은 사람들, 방향을 잡느라 정열을 잃은 사람들

* 구체적인 이야기가 후에 더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1부)라고 제목 뒤에 달았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권오승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권오승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기도문 – 99년 12월, FKCC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 이름을 알지 않고서는 도무지 누릴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도 그저 저희에게 벅찬 감격이 됨을 고백합니다. 도무지 저희에게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인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일년간 저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먹이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은 단 한끼의 식사도 먹을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저희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저희를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이나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외모보다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는 것을 저희로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모였을 때 보다 흩어졌을 때 더 powerful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중 장부를 만드는 일을 그치고, 부정한 방법으로 학교 성적을 올리는 일을 멈추고, 뇌물 주고받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하나님의 법이 흐르는 세상만드는 그런 공동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이야기하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조금만 더 참아주시옵소서, 저희가, 우리 젊은이들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과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의 소망이 되는 때가 올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잠시만이라도 이 교회를 거쳐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누었던 많은 사랑과 vision으로 가슴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누리고 쓰는 것 보다 다른이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교회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형제들이 굶고 있는데, 그저 무슨 밥그릇에 밥먹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교회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한번만 듣기만 하면 주님앞으로 돌아와 영광스러운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외침, 단 한 덩어리의 빵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눈물, 전쟁의 포성 속에서 지하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있는 어린이의 공포에 싸인 눈,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아픔을 보시며 가슴아파아시는데 저희는 그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반찬에 밥먹을까만을 고민하는 그런 싸구려 인생들되지 않게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번주에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나 하는 것보다 우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주에 헌금이 얼마 들어왔나를 세는 것보다 어느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가를 찾을줄 아는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보시옵소서. 죄를 죄라고 외칠 때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땅을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돈, sex, 권력, 쾌락의 우상들을 보시옵소서. 오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필요로합니다.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지금도 지옥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가득한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을 보내주시옵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땅에 가득하게 될 부흥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로 하여금 그 부흥의 도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특별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사람들에게 바로 이 자리가 당신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거나, 직분을 가졌거나, 배경이 어떻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의 주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사람의 말솜씨와 기술로는 불가능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 마음에 닿으면 바로 그가 예수님 영접할 수 있게 될 줄 아오니 이 자리가 그런 영광스럽고 기쁜 자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 그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내 몸을 찢었노라고, 너의 삶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노라고 하나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서 있다가 침체에 빠진 사람들, 열정을 잃은 사람들, 더 이상 싸울 힘도 사랑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 다시한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일어서 주의 용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어 기도하는 용사들로 다시 세워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는 어떤것도 하나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자폐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희에게 기쁨도 감격도 진리를 깨달음도 행함도 아무것도 있을 수 없사오니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희로 주의 자녀들 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바로 이 시간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테크닉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지고, 저희가 그 죄의 무게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던지는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축하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1997년 10월 1일
권오승

1996년 봄 이전

자가는 언제나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하는 힘이 있다.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살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절한 죽으심으로 날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그
어찌 감동이 되지 않겠는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만났을 때 나는 수 개월 동안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을 만큼 그
분의 십자가는 언제나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
1990년에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 그러나 나는 그 이전에도
21년 동안 ‘모태출석교인’(‘모태신앙’이 아님)이었다! – 1991년 초에 성경공부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시작하면서 내게는
이상하리 만큼 크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으로 젊은이들이 서는 것이었다. 1990년이면 내가 대학교 4학년,
누가 봐도 나도 그들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도 젊은이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단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이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날이 있게 되리라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젊은이들에게, 복음이야말로 젊음과 인생을 다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 또 내 삶으로 그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 청년 사역을 위해 훈련받고 공부하였다. 말씀
묵상(QT) 훈련, 성경 해석 훈련, 기도 훈련, 소그룹 인도 훈련, 말씀 암송, 찬양, 친교 등에 training을
받았다.(혹은 스스로 했다.)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임원을 했었고, 성경공부 리더로 봉사했었다. 교회
밖에서도 소그룹 성경공부와 book sharing 모임, 과(科) 성경공부 모임, 일대일 전도 성경공부 등 여러 모임을
참여하였고, 인도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여러 가지로 내게 유익이 있었지만 특히 청년들에 대한 vision을 구체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내가 우리 청년부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은 그런데 이유가 있으리라.

1996년 봄
1996
년 봄부터 여름은 내게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암흑기였다. 1996년 초부터 청년부 일들에 많이 관여하게 되면서 청년부 내에 의외로
‘뒷 얘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고 있음을 보았다. 청년부 겨울 수련회 도중에
일어난 사고로 그 문제들이 더욱 돌출 되는 듯 하더니 당시 청년부 담임 목회자이셨던 피전도사님께서 갑작스럽게 사임하셨다. 교회에
와도 기쁨이 없고 터놓고 말을 할 사람 하나도 없어 나는 개인적으로는 매주 ‘이번 주까지만 이 교회 나가고 나도 다음주부터는
이놈의 교회 때려치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개되지 않는 ‘소문’만 무성하고, 성경 공부에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교회를 사교클럽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아마도 그것은 내 영적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부정적인 것들만을 크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이놈의’ 청년부는 말라죽기 일보 직전의
청년부였다. 교회를 나가는 것이 힘들어 교회만 다녀오면 한숨을 쉬며 울었다. 나는 그러나 처음 보스턴에 올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vision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그만두고 미국교회로 옮길 수는 없었다.

1996년 여름

나님께서는 내게, 그리고 청년부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시작하셨다. ‘오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된 새벽기도가 어찌된
일인지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청년들이 하나둘씩 새벽에 나와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월말에 있었던 KOSTA.
내게는 개인적으로 큰 영적인 회복을 준 계기가 되었다. 얼마나 KOSTA에서 울었는지 모른다. 집회 때마다 감사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그리고 회개를 하며 울었다. ‘부흥의 불길을 온 땅위에’라는 주제로 집회가 진행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참된
‘부흥’에 대해 동국이형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런 부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라 정말 이 KOSTA를
통해 부흥이 있었으면 하고 기도했다. 실제 참된 ‘부흥’의 집회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부흥에 대한 소망을 더욱 크게
부어주었고, 그 소망과 우리 청년부를 연결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부흥에 대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이 청년부에, 이 교회에… 19세기 후반 바로 이 보스턴에 있었던 그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다면…
아, 부흥!

1996년 늦여름
영적으로 많이 회복을 시켜 주셨고, 기도의 영(靈)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서
기도하게 하셨지만 아직도 내가 사역할 곳이 바로 ‘이 청년부’인 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혹시 다음 학기
총회에서 내가 청년부 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어쩌면 회장으로) 사역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애착도 크지 않은데다가 여러 가지로 상처가 있는 공동체에서 그것도 담당 목회자가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 임원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냥 무작정 피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이 청년부에서 아무런 열매도 없이
burn-out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당시 청년부 회장으로 있던 석영이에게 가을이 되면서부터 리더를 그만두고 교회를 옮기겠다고
이야기했다. 석영이는 약간 당황하며 같이 기도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비교적 흔들리지 않을 듯 보였다.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 상처받으며 버티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내 살 길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996년 총회
청년부
총회 날까지도 나는 내가 교회를 옮겨 미국 교회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총회 전까지도 성호를 비롯한 몇 사람들을
만나며 청년부 회장으로 봉사할 것을 고려해 보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나는 어떻게든 청년부 회장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청년부 회장으로는 참 부적절한 사람이다.) 총회 당일, 나는
교육관에 내려가지 않고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냥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꽤 시간이 지난 것을 생각해 이 정도면 사람들이
거의 뽑혔거나 최소한 후보 추천 정도는 끝났으려니 생각하고 늦게 교육관으로 내려갔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후보 추천이 되었고, 개표한 결과 성호와 동수 득표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내가 회장이 되었다. 나는 눈 앞이 깜깜해 졌다.
그냥 ‘이건 아니야’라며 외치고 뛰어 나가고 싶었다. “하나님, 전 이 청년부가 싫어요! 그리고 전 이 청년부에 아직 동역자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고, 전…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저 혼자 burn-out 될 것 같아요!!! 사랑하지도 않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회장을 할 수 있어요?”

1996년 가을학기 초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놀랍게 역사 하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생각은 이 청년부가 영적인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 수만 많아져서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많다는 것이었다. 우선 우리 청년부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끔 하는 것이 가장 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주셨다. 그 당시 QT 말씀도 consistent하게 그것을 말씀하셨고, 이상하리 만큼 읽는 책마다 그런 생각들을 더욱 크게 해
주었다. 우선 성경 공부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성경공부에서 아무도 와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힘이 없었다. 성경공부에서 삶이 나누어지고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고 승리하시는 모습들이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개의 성경공부 조를
만들고 조장들을 세웠다.(지금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알다시피 신입조를 포함해서 모두 11개의 성경공부 조가 있다.)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죽은 영혼 살리는 것이라 믿고 첫사랑 조를 만들어 세웠다. 청년부 금요 모임은 그냥 모임이나 ‘집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찬양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를 손잡고 부르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focus가 맞추어지도록 모임을 인도했다. 그리고 매주의 모임이 하나님 안에서의
‘잔치’가 되도록 하였다. 가능한 모든 곁가지를 없애고 말씀과 기도라는 본질에만 집중하고자 노력하였다. 96년 KOSTA에서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울던지 웃던지 둘 중의 하나는 할 수 있는’ 모임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당시 내게 주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기대는 실제로 이루어져 나갔다.

새벽기도

년부가 살아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8월부터 한 두사람이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늘어
나중에는 서로 ride를 받아 새벽에 나오게 되었다. 점차로 사람이 늘었고, 다른 교회의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새벽마다 기도하러
왔다. 새벽마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가을이 지나 겨울로 가면서 날씨가 추워지면서 오히려 더 많은 청년들이 새벽에 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교회 van이 ‘터지길’ 기도하면서 이 기도의 불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정말 큰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들이 커져갔다. 컴컴한 새벽에, 밤늦게까지 공부에 ‘지친’ 몸을 이끌고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은 1년 동안 엄청나게 벌어졌다.

주학선 목사님

쩌면 우리의 모임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우리가 가졌던 첫 기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가슴이
뜨거운 청년부 담임 목회자를 보내주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였고 걱정도 되었다. 이렇게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청년부의 불길을 정말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실, 워낙 청년부 모임에 대한
기대감들이 청년부 내에서 크게 확산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도 매우 컸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대로 좀 더 오래 끌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
믿음이 부족함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10월 첫째 주부터 청년부를 맡으신 주학선
목사님을 처음 뵙고, 사실 그분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인 것 같다.’는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실제 주학선 목사님은 우리 청년부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오신 가장 적절한 분이셨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가 막히게 보내셨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다가 혼자 무릎을 탁하고 친다. 그후로 지금까지 주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하고 믿기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일들을 주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부에 행하실 것이다.

1996년 가을 이후
나는 금요일에 앞에 나가 광고를 하기 전엔 언제나 얼굴
하나 가득히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걸 허겁지겁 닦고 나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은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임에
임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찬양의 강도가 달라졌다. 성경공부에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하였고, 각자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였다. 주목사님의 잔잔하지만 power있는 message에는 매주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다. 새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나타났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고 축복해 주었다.
떠나는 사람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 공동체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였다. 또, 청년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도 들렸다. 사실 이때쯤부터 청년부 리더들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비해
새로 오는 사람들과 막 예수님을 믿고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리더들 care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다.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무언가 이 공동체에 이루시겠구나 하는 기대감들이 더욱
커져갔다.

1997년 겨울 수련회 –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수련회를 위하여 거의 두달동안 새벽기도때
마다 기도하였고, 준비가 본격화되면서는 모두 한 방에 모여 기도하였다. 주학선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기로 하였고, 이 수련회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해지고, 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다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느끼는 수련회가
되도록 기도하였다. 또한 이 수련회를 통해서 이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로 ‘한 몸’이 되도록 기도하였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의
힘에는 참 놀라운 힘이 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정말 어쩌면 이 수련회에서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게 되었다. 수련회 당일은 눈이 왔다. 이 눈으로 인하여 기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수련회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청년부에게 주신 이 기대를 꺾으실 리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수련회장까지 안전하게 도착하였고, 이틀동안의 수련회가 진행되었다. 찬양과 기도, 말씀. 모든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임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 날 저녁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참으로 하나임을 보여주셨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다. 형제,
자매들의 얼굴이 다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을 좀처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청년들이 가지는 아름다운 power – 할렐루야!

1997년 겨울
1997년
초는 내게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기간이었다. 지도교수가 fund를 끊어 내가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더니
곧이어 박사과정 oral qualifying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바로 지도교수가 더 이상 project를 같이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해왔다. 이렇게 어렵게 처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를 transfer 할
것, 한국으로 돌아갈 것 등 여러 가지를 놓고 기도하며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며 매달렸다.
하나님께서는 청년부를 떠올리게 하셨다. 제비뽑기라는 ‘이상한(?)’ (그러나 성경적인) 방법으로 회장이 된 것을 상기시키셨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이 청년부에 행하신 일들을 보이셨다. 그리고 아직 내가 이 곳에서 할 일이 더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힘든 일들을 통해 평생의 동역자가 될 자매(!)와도 맺어지게 하셨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청년부는 분명 내게 등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1997년 봄
청년부는 더욱 성숙해 갔다. 더욱 성장해 갔다. 약간의 기복이 있긴 했지만 점차로
성장해 나가는 청년부의 모습은 매우 벅찬 것이었다. 비교적 본 궤도에 올라 청년부에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고 더 탄탄한 ‘조직’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폭발하는 듯한 힘이 다소 수그러든 것 같은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매너리즘에 빠져
전심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에 게을리 하였다. 약간의 잡음과 의견의 대립(?)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 적절하고 지혜롭게 반응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1997년 여름
많은 지체들이 한국과 그외에
집을 방문하고 그 때문에 좀 혼잡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도 청년부는 참 탄탄하게 모였다. 오히려 성경공부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QT가 더 많이 확산 되었다. 다만 새벽기도는 조금 주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하나님께서 다시 청년들을
새벽에 깨우셔서 다시 한번 van이 터지도록 새벽마다 모이는 모습이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1997년 가을

제 몇 주전에 또 다시 청년부 총회가 있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새로운 임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일년전
떨떠름한 표정으로 회장이 되어 얼떨결에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사정없이 인도되어진 모습들이 머리속에서 지나간다. 참으로, 지난
1년은 청년부가 크게 성장한 해였고, 그 덕분에 나도 그 안에서 같이 성장 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청년부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그렇지 않겠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참 청년부 회장하길 잘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vision들과 열정들
때문에 행복한 1년 이었다. 다만 부족한 사람을 청년부 회장으로 둔 탓에 더 크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능력들이 많이 제한되었음을
느껴 고개를 들기가 참 부끄럽다. 그러나, 심지어 나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내게 있는 이런 위안을 다른 형제, 자매들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97년 가을 이후

나님께서 지난 1년동안 우리 청년부에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적인 장님들이 눈을 뜨고, 영적인 중풍병자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나도 사실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기대감들을 부어주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청년부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일들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참으로 “썩을” 세상이라고 사람들이 한탄을 한다. 한국과 한민족은 희망이 없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대를
역행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진다면 이 “썩을” 세상도, 앞이 캄캄한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의 미래도 우리들로
인하여 희망의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던 것이 의인 10명이 없어서 였던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의인들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불러서 훈련시키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10년동안, 20년동안 이 세상을, 이 나라의 참담함을 우리로 인하여 참으며 기다려 주실 것이다! 우리
손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선 이 땅을 고치실 것이다. 1890년대 후반에 바로 이곳 보스턴에 있었던 ‘부흥(Revival)’,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바로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여 이 땅을 고치는 일들을 감당하며 살게 된다면
우리로 인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우리 청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부흥은
이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소망이다.

끝으로 청년부 회장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로 동역해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감사드리고 목사님을 비롯한 리더와 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많은 기도와 조언으로 도와주며 동역해준 동국이형에게
감사하고, 이런 목회자를 한번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할 주학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날 위해 많은 기도를
‘뿌린’ 수영이에게도…. 그리고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참 좋다. 그리고 청년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난다. 청년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