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어제 글에서도 짧게 썼지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

8 thoughts on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1. ‘은혜에 잠기도록 한다’라는 표현이 참 와닿네요. 글의 취지는 물론이구요.

  2. 참 공감이 되고 또 깊이가 느껴지는 묵상이다. 사실 약자의 상태 혹은 고난의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알아가고 이해하기 좋은 상태임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그 어려움이 이해되어지고 의미가 부여될 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은혜임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장래 성공을 바라보게 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게 하거나 위로를 받는다면 결국 성공했을 때 즉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 훨씬 더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더 큰 자신의 권력과 힘과 영향력에 의지하여 결국 자신과 주위를 망가지게 되는 길이 될 것이고, 성공을 못 했을 때도 역시 원망의 길 후회의 길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1. 네… 공감/동의 합니다.
      얼마전에, 저희 동네에서… 옛날에 남서울교회를 형과 함께 다녔던 부부를 만났는데요,
      형이 눈치없이 기도 길게하던 얘기 등등을 나누면서 막 웃었지요. ^^

      그렇게 눈치없이 기도 길게하는…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 그래서 은혜외에는 소망이 없는 마음을 더 깊이 찾고 있습니다. 요즘.

  3.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졸개님의 묵상을 보며 내가 글을 읽는것이기 보다는 글이 나를 읽어 가는 과정들을 바라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서문을 도용한 듯한 느낌이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은혜”, “복음”, “진리”이라는 말도 내가 이해하는 피상적인 수준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것 같습니다.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이 그런 내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도움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절판되고 ‘한없이 부어주시고 끝없이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지만… “부랑아 복음”이라는 제목에서 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사라진것 같아 아쉬움이 남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네요)
    ‘강남좌파”도 아니고 사회 경제적 “약자”도 아니지만, 언제나 내 주안에서
    “약자”로서의 은혜와 긍휼 속에 잠식되기를 소망합니다.

    1. 아니,
      이런 허접한 글에, 이렇게 멋지게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멋진 답글을 달면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 글에 대해 한마디씩 하시네요.
      왜 그런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플로리다 인젠 날씨 풀렸죠? 적어도 저희동네보단 훨씬 더 따뜻할 것 같은데…

  4. 처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 뵌적도 없지만 더군다나 KOSTA에 참석한 적 없지만, RSS로 지속적으로 선생님의 글을 받아보며 도전도 받고 은혜도 받습니다. 올 여름에는 KOSTA에 꼭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위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졌고, 그래서 글을 남깁니다. 제가 오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오해를 풀어주세요.

    약자들에게 empowering 함으로서 그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관해서 비판하시고 그것을 인간적인 복음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도록 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제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두 가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약자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은혜는 무엇인가요?

    만일 약자가 파울로 프레이리 (Paulo Freire)가 교육했던 1960년대의 브라질 노동자계급을 말한다면, 글을 읽지 못하면 참정권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모습을 띄게 될까요?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한국에서처럼 돈이 많고 사교육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가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비정규직이 되어서 같은 노동을 하면서 월급은 삼분의 일만 받게 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최근에 한국 GM대우에서 천명이 넘는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켰습니다. 이는 5년에 걸친 장기간을 투쟁하면서 마지막까지 버틴 2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 생각을 해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 중에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해고노동자들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주고, 투쟁할 수 있도록 천막을 사다주고,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성령을 좇아사는 삶이 아닐까요?

    아래의 기도문은 어떻게 해석되야 하는걸까요?

    오 하나님, 굶주린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p. 18.

  5. Pingback: 목수의 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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