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묵상

요즘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2장을 연구하고, 묵상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내 마음에 두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있는 장이어서 특별히 마음을 많이 쏟아 본문을 보게 되었는데…

바울이 자신의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리고 ‘새로운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잘 비교가 되었다.

New Perspective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를 떠나서,
예수 이전의 바울 자신과 예수 이후의 바울에 대한 명확한 대비가 나타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비판을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옛 모습’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기도 한 것이었다.

비판이 힘이 있으려면,
그 비판이 자신의 아픈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아픈 고백을 바탕으로 터져나온,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고백이 바로
갈라디아서 2:20 이 아닐까 싶다.

갈라디아서 2:20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글 재주가 짧아.. 그 말씀을 읽으면서 다가왔던 충격과 감동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어제 글에서도 짧게 썼지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