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 빠진 사람

늪에 빠져 점점 진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거나,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은 그저 얕은 진흙탕일 뿐이라고 자신과 주변 사람을 속이고 있다면…
밧줄과 같은, 붙잡고 나올 것들을 던져줌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을 그 늪에서 건져낼 방법이 있을까?

혹은,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자신이 늪에 빠졌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긴 한데,
막상 도움을 주려하면 그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거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아무런 방법이 없다면…
그래도 그 사람을 늪에서 건져낼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주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을 섬기고 돕는 일은, 그 일이 어떤 일이건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을 만나면,
사람을 섬기는 일 자체를 포기하게 되거나,
그 사람을 돕지 못하는 나 자신에 실망을 하게 되기 십상인데…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 밖으로부터 (extra nos) 주어지는 ‘은혜’가 있다.
은혜란, 그 늪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에서 강제로 붙들어 끄집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할때,
쉽게 실망하거나 낙심하는 이유는,
은혜가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은혜

살다보면,
무한정 쏟아져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는데…
내 파이프가 막혀있어, 그것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때로는 그 은혜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발견하여 제거할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은혜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는 하지만, 제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그 절망감 속에, 가난한 마음이 되어,
내 힘으로 그것이 제거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두배, 세배 이상 큰 은혜가 다시 밀고 들어와…
그 막힌 것이 순전히 은혜로 뚫려지는 경험을 하게되기도 한다.

어떤의미에서,
바로 그런 순간이야 말로…
순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많은 이들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어제 글에서도 짧게 썼지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

큰 아들 신드롬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주일 설교가 ‘탕자의 비유’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주에는 ‘큰 아들’에 맞춘 설교 였는데…
어쩌면 많이 들어서 아는 그런 이야기였다.
큰 아들도, 작은 아들 못지 않게 lost son 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 다 아는 이야기를 참 설득력있게 전달한 설교자의 재능이 참 돋보였다.

어제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그 큰 아들의 문제를,
불평하는 마음이라던가, 부정적인 생각 등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최근…
나 자신이 그 ‘큰 아들’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내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의 문제가, 불평하는 마음을 갖는 다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 같은 ‘얕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 그 자체의 깊은 의미가 그저 내 생각과 마음을 겉돌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judgmental함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내 ‘은혜 없음’은…
내가 그 은혜의 의미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까지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 은혜…
그 은혜의 의미가 그저 shallow한 수준으로 이해되거나 잠깐 뜨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골수에 사묻히도록 그렇게 새겨지면 좋겠다…

은혜… 은혜… 은혜…

Grace!

지낸 주말을 지내면서,
몇편의 설교를 듣고…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면서 나름대로 묵상/생각할 기회도 있었다.

그 생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내가 최근 몇년간 은혜(grace)에 대한 생각과 묵상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자격이 없는데 값없이 주어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삶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 내가 무엇인가를 주도해서 하려는 성향이 과해지거나…
– 다른 이들을 향한, 그리고 심지어는 나 자신을 향한 compassion이 심각하게 약화되거나…
–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분이 오래 가게 되고…
– 다른이들에 대해,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최소한 지켜야할 도덕률이나 책임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는 것등이다.

은혜, 은혜, 은혜…
Phillip Yancey가 이야한 대로…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여러 용어중, 세상이 차용하여 뜻을 오염시키지 않은… “the last good word”.

그것을 말로 풀어내자면 그 풀어내는 작업 자체가 단어의 뜻을 손상시키는… 바로 그 은혜…

I really need to get back to that more often, daily…

비뚤어진 의도

사람을 대할때,
그 사람의 의도(intention)에 대하여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미워보이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그냥 멸시하거나 포기하거나 싫어하게 된다.
무엇이 그 사람의 동인(motivation)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준이 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주 잘못된 의도와 동인으로 서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순간 그 중심에 ‘내’가 서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멸시하거나 포기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참아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라도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