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수요일

수요일
다른 기록은 없고 예수께서 물러나셔서 기도/휴식 한 것으로 생각됨
가룟유다의 배신 (마가복음 14:1-11) – 이 본문은 화요일의 사건으로 생각되기도 함

나를 그토록 이 신앙 안에 붙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새 시대에대한 소망일까?
구원에 대한 감격일까?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헌신일까?

물론 그것들이 다 맞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이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절규하시면서까지 전 인류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
힘든 대학원 생활 중에…

고난주간에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점심시간에 공터나 주차장 한 구석에 가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로 흐느껴 울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의미에서 보면,
meta-narrative를 강조하는 emergents의 사조를 일종의 legalism이라고 지적했던 Tim Keller의 주장에 참 공감이 가기도 한다.

4 thoughts on “고난주간 묵상 – 수요일”

  1. meta-narrative를 강조하는 emergents의 사조를 일종의 legalism이라고 지적했던 Tim Keller의 주장에 참 공감이 가기도 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을 해주실수 있으세요?
    제게는 조금 어려워서…–;

    1. 아이고,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무례를 범했군요… -.-;

      Tim Keller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을 보면, 복음을 이야기할때 개인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너희도 그 새로운 movement에 join하지 않겠느냐 는 식의 접근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다른 형태의 율법주의가 될수 있다.
      이런 복음을 듣고서, ‘내 쇠사슬이 벗어졌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고 싶다’ 는 식의 반응을 보이긴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하면,
      거대담론(meta-narrative)의 접근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등)
      개인적인 죄에 대한 강조,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조,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한 강조 등 좀더 classical한 강조점들이 약화된다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양쪽의 입장을 모두 다 수용하는…
      박쥐와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
      다만 이번 고난주간에는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제 개인의 죄를 위해 죄짐을 지신 주님의 모습을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네요…

  2. 사려깊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설명을 듣고나니 복음은 알아 갈수록 그 깊이를 알수없는 심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평면적 사고와 흑백논리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
    복음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방법인 것같습니다.

    눈높이 설명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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