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심, 다락방 설교, 대제사장의 기도 (마태복음 26:17-35, 마가복음 14:12-31, 누가복음 22:7-38, 요한복음 13:1-17:26)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잡히심 (마태복음 26:30-50, 마가복음 14:26-52, 누가복음 22장 39-53절, 요한복음 18:1-11)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리고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예수께서 마음 속에 가지신 간절함이,
목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기술한 복음서의 본문에 잘 드러난다.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락방 설교에 이은 대제사장의 기도는,
언제 읽어보더라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할 것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 주시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까지 비장하실까.
특히 대제사장의 기도를 읽어보면, 마치 영영 그들을 떠나는 것 같이 기도를 하고 계시다.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본문에서도 역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영영 다시는 못볼것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내가 다 풀어낼 수 있을것 같지는 않지만,
몇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1. ‘옛시대’의 마지막을 마무리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양쪽 시대의 연속성/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때의 장엄함은 많은부분, ‘옛시대’가 간다는 사실과, ‘새 시대’의 위대함에 기인한다.
2.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케노시스), 십자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에 대한 clear한 그림 자체를 다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셨다.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것은 맞지만, 그분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습과 같이 되시는 ‘비움 (emptying himself)’의 상태에 계셨으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아는 것 조차도 surrender 하신 상태였다. 따라서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인 장엄함에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3. 예수께서는, 심지어 죽음 이후의 일을 아셨다 하더라도, 당장 경험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진노, 아버지 하나님과의 분리의 중압감이 말로 다 할수 없이 크셨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의 fellowship을 가지셨던 분인데,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죄에대한 진노와 심판을 온 몸으로 받으신다는 것이 우리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이다.
글쎄…
나로선 어떤 한가지 입장을 선뜻 취하고 나머지를 버리거나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고난주간에, 내가 곱씹어 생각해보는 것은 이것이다.
그분은,
바로 그 목요일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아픈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위대한 죽음이기도 하였다.
그 죽음 이전 마지막 시간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친구였던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다.
그리고 마지막 그들에게 주고 싶은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부어주고 계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저 종교적으로 제자들을, 사람들을, 세상을, ‘사랑’하셨던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정말 제자들을, 사람들을, 세상을, 좋아하셨다.
함께 있는 것을 즐기셨고, 동행하기를 원하셨다.
잠시 떨어져 못보게 되는 것을 가슴아파하실만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그것은 정말 미스테리이다.
사랑받을만한 존재도 아닌데… 그분이 그 모든 것을 버려가며 건져야할만한 존재가 결코 아닌데…
이제,
바로 그 궁극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금요일로 향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