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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우기

늘 ‘논리’는 내게있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 논리가 물론 완벽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나,
적어도 그 논리의 틀 안에서 나와 세상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논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일까?

마치,
한가지 언어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과 만나면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은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이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논리, 혹은 체계적인 사고를 통해 세상을 분석 혹은 통합하려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내가 잘 대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는
논리 없이 바닥바닥 우기는 사람,
지극히 직관적인 판단을 하면서 그것은 논리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
논리는 머리아프니까 그때 그때의 감성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등과 같이.. 다소 비뚤어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논리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분석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
내 논리의 틀로 사물을 분석해내기 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가 나를 분석해주기를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한번,
겸손함의 중요성을 느낀다. 

무지개

Boston이나 한국에 있을땐 거의 보지 못했는데,
Northern California로 이사온 이후 이른봄 경에 늘 많이 보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무지개이다.

우기인 겨울이 끝나가는 때가 되면,
햇볕이 비치면서 비가 함께 내리는 때가 많은데, 그때 각도가 잘 맞으면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의 겨울을 지내면서 무지개를 5-10회 정도는 보게되는 것 같다.

위의 사진은 지난주에 출근하는 길에, 신호등에 잠깐 섰는데, 옆에 멋지게 펼쳐져 있던 무지개를 찍은 것이다.
완전한 반원이 멋지게 있었는데, 차 안에서 전화기를 가지고 사진을 찍다보니 위의 모습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 지난주에는,
우리집으로부터 불과 몇백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쌍무지개가 완벽하게 뜬 것을 보았다.
해질무렵에 약 15분가량 보였었는데,
그렇게 선명한 무지개를 본적도 별로 없었거니와,
워낙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완벽한 아치의 쌍무지개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민우도 얼른 자기 전화기를 꺼내들어 멋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는데, 그것이 잘 나왔는지 모르겠다. 🙂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며,
그것으로부터 무슨 멋진 묵상을 이끌어낸다거나.. 그런 것도 좋겠지만,
그저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며 탄성을 함께 지르고, 기뻐하는 것 자체에 머무르는 것 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인 듯 하다.

Not an Ideal Life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나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삶의 영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어그러짐은 그래도 둔채, 내 삶의 영역에 한해서만 “justice”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내게 공평하지 못하고,
왜 내게 이런일이 라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의 일부를, 내 삶으로 embrace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너무 쉽게 내 삶의 영역의 어그러진 부분을 곧게 펴보려는 시도는,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품고 사는 삶…..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기

고등학교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다.
게다가 과학고등학교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사춘기 후반부를 보냈다.

내가 과학고에 다닐 때에는, 물론 그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 이외에도 ‘별난 아이들’, 혹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고에 들어가는것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지금같으면, 나는 절대로 과학고에 못들어 갔을 것 같다. ^^)

일반학교에 갔더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묻혀버릴만 한 애들이, 과학고라는 독특한 환경에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우리학년 60명중 80% 정도가… IQ 155 이상이었고…
어찌보면 약간 ‘싸이코’ 들이 모여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학고 아이들만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농담, 생각 체계 등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전국에 4개 밖에 없는 과학고에서 비슷한 애들이 대학에 모였고,
소위 ‘일반고’ 애들도 그런 분위기에 흡수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야말로 out of nowhere에 딱 학교 하나 있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당구를 치기 위해서 금요일 밤에, 동네의 경운기를 타고 유성까지 나갔던 기억도 있다. -.-;)
일반적인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별로 없었는데,
대신 정말 ‘독특한’ 문화를 참 많이 경험했었다.

그야말로, 과기대 (그 당시에는 KIT 였다. 한국과학기술대학) 애들만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리, 언어들에 더 익숙해져갔다.

그 이후,
대학원 역시 그랬고,
그 이후 2년+의 직장생활도 그 연속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었으니,
NERD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와 생각 밖의… ‘정상적인 보통사람’의 논리와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더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었던 충고들 가운데 가장 날카롭다고 느꼈던 것은,
‘너는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은줄 안다’ 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NERD들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학부를 마친 내 아내 조차도,
내가 ‘극단적인 공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이런 background가,
때로는 내게 도움과 힘이 되기도하지만,
많은 경우 내 생각의 체계 안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하는 것 같다. 

언어 뒤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던가,
특정한 생각의 흐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
혹은 다소 치우쳐 보이는 사상이나 믿음의 이야기에 ‘올인’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대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매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극단적으로 위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선호와 기호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언어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필요와 생각, 고민과 갈등을 알아내는 일이,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유난히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유난히 세속적 성공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과 관련된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대해 논리적 반박을 늘어놓는 일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치우친) 논리 뒤로 도망가 숨어버리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때,
superficial하게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고,
오래 참고,
그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면 참 좋겠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너무나도 성숙이 답답하도록 더디다. 

겸손이라는 ‘테크닉’

겸손이라는 성품만큼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덕목(virtue)가 많지 않는 것 같다.
진실하게 겸손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런의미에서,
겸손이라는 ‘테크닉’을 완전히 마스터할 수만 있다면,
소위 ‘처세술’, ‘용인술’, ‘화술’, ‘대화술’등의 기술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겸손’은 거짓으로 꾸며내기 가장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이다.

섣부르게 가장한 겸손은,
오히려 거부감만을 불러일으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로 시작하는 빌립보서 2장 5절 이후의 본문은,
낮아짐과 겸손함의 basis가, 처세술이나 대화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멋진 구절인 것 같다.

싸워야 할 적, 도움을 얻어야할 동지

가끔은,
아니 솔직하게는 매우 자주…

도움을 얻어 함께 해야할 ‘동지’를, 맞서 싸워야할 적으로 잘 못 설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싸워야할 대상을 동지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되면,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사명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는 그것을 삼켜나가는 것 같은 일이다.

사탄이 매우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속임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