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할 긴장과 해결할 갈등

내가 아주 자주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유지해야할 긴장과 해결해야할 갈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건강한 긴장을 통해서 성숙과 균형을 만들어 나가는데, 그것을 간과한채,
모든 긴장관계를 부자연스러운것으로만 여겨 없애버리게 되면,
제어되지않는 독선만이 남게 된다.

나는 유지할 긴장을 받아들이는 연습과 훈련이 훨씬 더 필요한 것 같다.

빠릿빠릿한 나

나는 대체로 “빠릿빠릿”한 편이다. ^^
이게 꼭 자랑은 아니고…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이게 자랑이 아니라는게 들어나겠지만…)
그냥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렇게 빠릿빠릿한 사람 옆에,
다소 느긋하거나 동작이 느리다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게되면,
그 느긋한 사람의 성품은 너무나도 자주 ‘열등함’으로 잘못 비추어지곤 한다.
느긋하거나 여유가 있는 것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성품은, 그 성품 자체가 공격적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되기도 하고.)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강.적. 들을 만날때가 있다.
느긋하고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서 그 느긋함이.. ‘더딘 열등함’이 아니라…
‘선이 굵은 깊음’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내 빠릿빠릿함이 가벼움으로 비추어지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앞으로 두어달동안… 그런 분들 몇분을 오랜만에 만나게 될 것 같다. 기대가 크다.)

Being Intentional

리더쉽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은
‘의도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의 대화, 짦은 충고, 한번의 손길이나 눈길 조차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신중하게 해야하는 것 같다.

즉흥적인것 같아 보이는 행동들이, 깊은 impact를 미치는 리더들을 보면,
오랫동안 의도를 가지고 살아온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지,
그저 운이 좋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뿐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은 말 한마디나 손짓 하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리더를 만나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는가 vs.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숙한 사람일수록,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간난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생각해보자.
엄마는 간난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아, 지금 나는 젖먹이는 일을 하고 싶은데 기저귀를 갈고 있다니… 하는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로서의 identity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섬기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내가 만일 아빠로서,
아… 나는 내 아내가 지금 기저귀를 가는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 내 아내는 기저귀를 가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게다가 기저귀 갈때 가장 행복해 하는 것 같은데…
라고 하면서 젖먹이고 있는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본다면…
나는 어쩌면 아빠로서, 그리고 간난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남편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밤에 아이가 울면…
아빠가 되었건 엄마가 되었건… 졸린몸을 일으켜 세워 젖병을 찾아 물리고, 기저귀를 봐주고, 토닥거리며 재워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기저귀를 가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거나, 젖을 먹이는 사람으로 세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지금 기저귀를 갈아야 할때인지, 젖병을 물려야 할 때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리고 여러가지 기저귀에 대해서 연구도 하고, 젖꼭지 모양을 유심히 살피는 일들도 해야하지만…
그것은 젖을 잘 먹이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이다.

스스로를
‘사역자’라고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특히 리더들에게…
요즘… 많이 해주고 싶은 말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그것이 지나쳐서 자신과 주변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못한 채, 과대평가한 자신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 사람이 특별히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도 마음이 아프다.

그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tentatively 정리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2.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만이 과대평가라는 보호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하는 뒤틀려짐(distortion)으로부터 그 사람을 끄집어 낼 수 있다.

3.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사람과의 정직한 대화, 사랑의 포용, 질책이나 충고 등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내용에서,
1과 2는… 어떤 의미에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다.
결국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3의 항목을 생각해보면,
참 길이 막막하다.

어떤때 그 사람과 정직한 대화를 해야 하는지, 어떤때에는 지적보다는 포용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떤 tone으로 충고나 질책이 필요한건지 등등…
참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major battle이 3의 항목에 있지 않고, 1과 2의 항목에 있는 것이라면,
비겁한 회피일수는 있겠으나,
3의 항목을 접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이나 frustration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것이고.

언어 뒤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던가,
특정한 생각의 흐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
혹은 다소 치우쳐 보이는 사상이나 믿음의 이야기에 ‘올인’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대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매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극단적으로 위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선호와 기호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언어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필요와 생각, 고민과 갈등을 알아내는 일이,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유난히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유난히 세속적 성공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과 관련된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대해 논리적 반박을 늘어놓는 일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치우친) 논리 뒤로 도망가 숨어버리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때,
superficial하게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고,
오래 참고,
그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면 참 좋겠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너무나도 성숙이 답답하도록 더디다. 

오지랖 넓은 사람의 어리석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많아,
늘 바쁘다.
그리고 자주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나라도 때워야 하겠다며 달려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요즘 깊이하고 있다.

자주 나는 그것을 passion이라고 착각해왔으나,
그저 어리석게 오지랖 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control-freak으로, 내가 control을 잡고 있으려는 악한 생각에 근저에 깔려있을 수도 있다.

다른 이의 짐을 져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다른 이의 일을 해주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은… 악한 일이 아닐까 싶다. 

조언을 받아들이기

총무간사로 섬길때, 여러가지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은…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다짜고짜 코스타란 이런 것이라며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시기도 하고,
한시간씩, 전화를 통해서 일방적인 ‘조언’을 들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중학교때 반장해본 이후로는 한번도 리더쉽을 행사한적이 없으면서, 리더쉽에 대해 나름대로의 강의를 해주시면서 조언을 해주시기는 분도 있었다.
코스타의 10년동안 나아갈 방향을 혼자서 쫘악~ 제시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난데없이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며 “신령한” 얼굴로 접근하는 분도 계셨다.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화하여, 내 상황 혹은 코스타의 상황에 자신의 경험을 적용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많았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섬기는 내용과, 나를 잘 이해하고 있고, 지금 코스타의 상황등을 잘 읽으며 주시는 적절한 조언들도 있었지만,
대략 80% 정도의 조언은 out of context의, (죄송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들이었다.

이미 우리가 다 마음에 두고 계획하여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일이 꼭 필요한데 계획을 하지 않는다며 꾸중(?)을 들어야 했던 경우도 있고,
5년쯤 전에 이미 고민과 정리가 다 끝나서 정리가 된 일들에 대해 심각한 얼굴로 매우 새로운 이슈라며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코스타가 맞닥들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닌데,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제일 중요한 거라며 목청을 높이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에는…
대개 참 애매하고 어색했다.
소위 ‘내부사정’을 시시콜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그것을 대외적으로 share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데다,
그렇게 설명을 해도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이해를 하시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그냥 듣고나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 혼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기에는, 조언을 해준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떤 순간에는,
내게 쏟아지는… 그 out of context의 엄청난 조언의 홍수 속에서…
한 두어주만 잠수타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전화를 받거나, 이메일을 여는게 두려운적도 있었다.
(어떤 어르신들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시기도 하셨다. -.-;)

그렇게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을 들을 때면,
그냥 ‘인자한 얼굴’을 하고 그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혼자 애국가 가사를 몇번씩 외기도 하고…
(언젠가… 어떤분과 전화하면서는 시편 23편을 한 30번쯤 암송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분들의 그 모든 조언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이지만, 그 조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는 것들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그 사람이 그렇게 조언을 남발해야만 하는.. 그 사람의 personal need/상처를 바라보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내게 와서 조언을 해줄 정도록 정성과 열정이 있는 그분들의 마음을 감사히 보게되기도 하였다.
아주 황당한, 거의 말도 되지 않는 조언을 듣게되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정말 급하셔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조언을 통해서라도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보다”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될때도 있었다.

물론, 내가 간과했던, 중요한 point를 깨닫거나 재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많은 분들의 조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는 일들이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지금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들을 잘 하고 있는걸까?

언제 좀 더 성숙해지면,
그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게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많은 노력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내 죄된 본성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주변 사람으로부터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화시키게 되는 것 같다.

제게 조언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Leadership is an ART

“Leadership is an art”

Herman Miller의 CEO를 지냈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는 Max DePree의 책 제목이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여러 leadership을 경험하면 할수록,
내가 leadership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practice 하는 경험을 갖을 수록…
정말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방법론을 잘 풀어준다고 다 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이 IQ가 300쯤 되고,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행동을 바로 바로 control 할수도 있고,
순발력도 대단하고….
뭐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가르쳐서 될 수 있으려나…

마치,
운동신경이 상위 0.000000001%에 들도록 좋고,
체격 조건도 1세기에 나올까 말까 하게 좋고,
100m를 8초에 뛰고,
폐활량은 돌고래를 능가하고,
게다가 순간 판단력도 좋고,
자기 관리 철저하고,
머리도 엄청 좋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이론적으로 수영과 같은 운동하는 방법을 설명해서 그 사람이 운동을 잘 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사람은 사실상 없으므로…
Leadership은 art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리더는 정말 길러질 수 없고 타고나는 것인가.
내 conviction은 점점… 리더는 길러질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리더를 주시도록 더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