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뒤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던가,
특정한 생각의 흐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
혹은 다소 치우쳐 보이는 사상이나 믿음의 이야기에 ‘올인’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대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매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극단적으로 위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선호와 기호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언어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필요와 생각, 고민과 갈등을 알아내는 일이,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유난히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유난히 세속적 성공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과 관련된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대해 논리적 반박을 늘어놓는 일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치우친) 논리 뒤로 도망가 숨어버리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때,
superficial하게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고,
오래 참고,
그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면 참 좋겠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너무나도 성숙이 답답하도록 더디다. 

대화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1시간이 지루하지 않으나,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1분이 힘들다.

왜 그럴까?

여러가지 생각이 있는데…

내가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가 힘들다’고 정리하고 있는 중에,
그 ‘이러이러한 특징’을 내게서 찾을때…

아…
난감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는, 그저 그 이야기를 끝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참고 있을 뿐.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피곤하고, 지루하다.
나와의 대화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통념과 통찰

내 고등학교 1년 후배인, 노종문 IVF 간사가 최근 한국 IVP의 대표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점차 꽤 visible하게…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책임을 맡게되는 일들을 본다. 더 이상 기성세대를 비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IVP의 대표간사가 된 이후, 어느 인터뷰에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는 질문에 노종문 간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통념을 주는 책은 나쁜 책이고, 통찰을 주는 책은 좋은 책입니다.”

정말 멋진 말이다.
흔히 많이들 이야기 하는 대로 “두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한번도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말과도 통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짧게 글을 쓰거나…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message를 전하는 일들을 할때마다,
사실 그럼 부담을 깊이 느낀다.

사람들은 나로부터 통념을 얻어 가는가, 통찰을 얻어가는가.

통찰을 주는 책도, 대화도, 글도, 사람도… 정말 찾기 힘든 세상인 듯 하다.

생각을 흔들어 놓기

불과 2년 전 정도까지…
나는 잘못된 신앙의 태도와 노선을, 무지의 결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이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람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 일을 하려고 참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하고, 그쪽에서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좌절이나 혼란에 빠지게도 되는 일들을 보았다.  장기적으로 그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되어 결국 올바른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일들을 내가 목격한 적도 있었고, 그 끝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과의 연락이 끊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열망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의 기반을 흔들었을때 붙들 수 있는 무엇이 바로 가까이 있지 않은 상태일때에는… 그 사람의 기반을 심하게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대안이 될만한 가치체계가 가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새로운 대안을 취할 능력/여력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원래의 잘못된 기반을 심하게 흔드는 것은 자칫 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잘못된 기반에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있을 때에는 (정서적, 감정적 뿌리를 포함해서)
그 기반을 차라리 놓아두는 것이 최소한 잠정적으로는 올바른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내 자신을 define 하듯…
“변절한 이상주의자”의 궤변인걸까…

말을 줄이기

나는, 정말 너무 말이 많다. 정말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잘 듣지 못하고, 듣는 일에 둔하다.
그러다보니 말 실수도 많고.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갈길이 멀다.

말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몇가지 생각해 보았다.

1. 나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
듣는 사람이 어떻든지 간에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한다는 desire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생각이다.

2. 다른이들의 말과 생각에 비해 나의말과 생각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만함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과는 정 반대의 idea 이다. 나의 짧고 얕은 생각의 결과에 흥분한 나머지 다른 이들의 깊고 풍성한 생각, 혹은 더 깊은 실존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3. 다른이들로하여금 나를 accept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일종의 열등감과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insignificant 해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를 드러내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있게 되는 듯 하다.

또 뭐가 있을까.

당연한 말을 또 한번 하기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연한 말을 또 한번 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참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
나와 대화상대가 이미 공통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이야기하는 것 등등…

아마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배운다.

매우 자주, 같은 presupposition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가만히 이야기해보면 매우 다른 presupposition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나와 매우 다른 context와 background에서 문제와 상황을 접근하기 때문에 의외로 내가 아주 기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함께 공유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인간이 모두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경우 내 대화 상태가 아주 당연해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니 왜 저런 말을 저렇게 길게 해야할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되지만,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과 사랑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배어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