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P 박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분은 설교중 30여년전에 K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나도 저분처럼 되고 싶다’ 고 생각하셨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이후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셨다고 하셨다.
그분의 설교 속에서, K 교수님이 보였다.
아….
K 교수님은 이렇게 훌륭한 후배를 남기신 거구나…
K 교수님은 어쩌면 생전에 P 박사님이 이렇게 설교하게되신다는 걸 모르셨을 거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거구나…
어제 P 박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분은 설교중 30여년전에 K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나도 저분처럼 되고 싶다’ 고 생각하셨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이후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셨다고 하셨다.
그분의 설교 속에서, K 교수님이 보였다.
아….
K 교수님은 이렇게 훌륭한 후배를 남기신 거구나…
K 교수님은 어쩌면 생전에 P 박사님이 이렇게 설교하게되신다는 걸 모르셨을 거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거구나…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 1:10-12)
실리콘 밸리에서 살다보면 늘 성공과 승리의 (거짓) 스토리들을 듣곤 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성공와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서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나도 신앙에서 그런 승리와 성공을 추구하는 함정에 너무 자주 빠진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는데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상이라면,
그 세상에서의 삶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다만, 그 속에서 그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인 것.
KOSTA 같은 집회를 하면서,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 늘 스스로 자꾸만 remind 해야하는 생각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싸움은 계속해서 우리가 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참 많다.
그리고 실제로 많이 지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그런 승리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수 많은 좌절과 실패 속에서 갖는 소중한 특권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
6월 첫주에 엄청 아팠다. ㅠㅠ (지내고 나서 생각해보면 COVID-19이 아니었다 싶기도 하다)
원래 6월 첫주에 태국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픈 바람에 출장을 한주 미루어야 했다.
나는 천식이 있어서 이렇게 한번 감기/독감 같은게 걸리고 나면 그 후 한참동안 기침을 하면서 보낸다.
6월 둘째주 태국에 가서 처음 며칠은 그래도 꽤 고생을 했다.
기침도 심했고, 컨디션도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시차에 잠도 못자고 엄청 강행군을 했으니…
그나마 지난주에는 조금 나아져서 그럭저럭 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지난 주말 집에 돌아왔는데 시차 때문에 아무래도 이번주는 좀 헤매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쿨럭)
예전처럼 시차 적응이 빨리 되지도 않고,
조금 무리하면 이번달 초에 그랬던 것 같이 확~ 아프게 되는 일도 벌어지곤 한다.
다음주에는 또 육체적으로 무리를 좀 더 해야할 예정인데…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정말 몸으로 때우면서 사는 시기는 확실히 지난거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충분히 나이가 들어 지혜롭거나 성숙해지지 않았는데, 몸만 삭았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지만,
태국에 뻔질나게 가면서 더 많이 느끼게 된 것.
태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불 정도되는 나라이다.
미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9만불 정도되고.
그러니, 스마트폰이 태국에서는 미국보다 8배 비싸게 느껴지는 것.
그런데 태국이라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안쓰는 것이 아니므로,
이 사람들도 미국사람들과 똑같이 비싼 스마트폰을 사게 된다.
물론 조금 더 싼 중국 스마트폰을 쓰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아이폰을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1천불씩하는 그 스마트폰이 그곳에서는 얼마나 비싸게 느껴질까.
Technology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걸 볼때마다 몹시 마음이 힘들게 된다.
내가 하는 일들은, 사람들을 풍료롭게 만들기 보다 어떤 사람들을 훨씬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
지금 약간 새롭게 앓고 있는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이걸 어떻게 다루어내어야 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단기적으로,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내 선후배, 친구들중 내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환영!
그렇지만,
이것도 또한 내 삶의 여정의 일부이고,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다시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씨름하면서 지내볼 생각이다.
다만,
시간과 체력이 부족해서 그걸 잘 할 수 있을지 약간 좀 고민이 되긴 하지만,
어떻게든 잘 manage해가면서 내게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30년전 예수 이름으로 생긴 병에 걸려 10년간 앓고나서 나름 해답을 찾았다면,
지금 이 상황에선 10년까지 그렇게 오래걸리지말고 어떻게든 길을 잘 찾아내보고 싶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내가 20년전에 나름 고통 속에서 세워놓은 내 나름대로의 원칙 – 성실함과 integriry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유익뿐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살려고 참 많이 애쓰고 있다. 쉽지는 않지만.
그러니 지금은…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는 살지만 그 성실함의 이유를 놓쳐버린 상황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걸까.
이것이 나와 이웃과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key는 ‘생각’이다.
이걸 약간 종교적인 언어로 묵상이라고 써볼수도 있겠지만
그냥 ‘생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삶에서 경험하고,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책을 읽으며 해석의 방법들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서 삶을 해석해가는 작업을 반복해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내 믿음이 과연 어떤 형태로든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라는 질문에 턱 막혀있는 나는,
요즘 그 생각을 펼치면서 지내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의 흐름이 몇달, 혹은 몇년 째 턱 막혀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요즘 나는 너무 바쁘다.
아침 6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하지 못한채 computer 앞에 앉아서 일을 하다보면 아예 회사 office로 갈 시간 조차 부족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아침부터 붙어앉아 밤까지 일하게 될때도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따로 읽고, 공부하고, 생각을 곱씹고, 고민해보고, 상상해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리듬이 깨어진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그 병이 다시 돌아왔다.
요즘은
일하는 것이 정말 큰 의미가 없게 느껴지곤 한다.
왜 이 병이 돌아왔을까?
이제 나는 naiive한 이상을 가질만큼 젊지 않다. 경험도 그래도 좀 있고, 회사와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약간은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세상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지금 세상은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풍요롭고 정의롭고 자유롭다. – 아… 지금이 매우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지금 정치도 문제가 많고, 사회에 부정도 만연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불과 몇십년전, 100년전, 200년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다.
나는 몇십년전, 100년전, 200년전의 사회체제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발전된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된 세상을 더 좋게 바꾸어가는 일에 내가 믿고있는 신앙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좁게 보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나와 내 주변의 삶을 더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내는데 거의 영향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정의롭지 못함과 깨어짐이 너무나도 공고해보인다.
심하게,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 모습들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지 정말 막막해 보인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도대체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가 계속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들과, 그 속에서 하는 내 모든 경험들이 하나님 나라의 큰 스토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만들고 있는 hardware 가 어떻게 사람을 직접적으로 돕는가 하는 것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가령,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일이, 스마트폰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는 전자부품을 만드는 일도 해 보았고, 전자기기를 만드는 일도 해 보았고, 의료기기를 만드는 일도 해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매일 하는 일은 늘 비슷했다.
결국 엔지니어가 하는 일은 data를 보고, 그것으로 적절한 결정을 하는 일들이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든 의료기기이든 그렇게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내가 만드는 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은 대개는 현실에서 일할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매우 tangible하게 느끼면서 매일의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박사과정 마지막 즈음부터, 그 이후 직장을 잡고 나서,
나는 정말 꽤 열심히 살았다.
늘 승승장구했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늘 성실하게 살았다.
나름대로 integrity를 지키면서 살려고 정말 노력 많이 했다.
그러면서 했던 생각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소방관같은 정말 이 사회에서 없으면 안되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신 더 많은 월급을 받으며 살고 있는데,
내가 정말 그런분들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내게 반복해서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다.
유치원 선생님의 어떤 작은 사랑의 행동 하나는 아이들의 삶 전체에 평생 영향을 줄수도 있을 거다.
정말 말도 다 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impact가 있는 중요한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종의 ‘죄책감’이랄까… 그런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성실함’과 ‘integrity’를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key로 삼고 살고 있다.
그것이 예수 이름으로 생긴 병을 manage하는 내 방법이었고 꽤 잘 작동해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