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더?

어제를 다 지내고 생각해보니,
어제는 ‘하루 더’ 있는 날이었다. ^^

2월 29일은 매년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야말로 보너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 텐데…

그 하루를 시작하면서,
“아… 오늘 이렇게 보너스로 주어진 시간을 정말 의미있게 보내야겠다”
고 생각했다면…
아마 어제 나는 다소 다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매일의 삶은 그저 내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정말… 그저… 은혜로.

어제 그렇게 appreciate 하면서 살지 못한 분량을,
오늘이라도 좀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최소한 이 사순절 기간 동안만이라도, 매일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좀 더 해보고 싶다.
(세상에 나처럼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그것이 지나쳐서 자신과 주변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못한 채, 과대평가한 자신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 사람이 특별히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도 마음이 아프다.

그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tentatively 정리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2.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만이 과대평가라는 보호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하는 뒤틀려짐(distortion)으로부터 그 사람을 끄집어 낼 수 있다.

3.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사람과의 정직한 대화, 사랑의 포용, 질책이나 충고 등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내용에서,
1과 2는… 어떤 의미에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다.
결국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3의 항목을 생각해보면,
참 길이 막막하다.

어떤때 그 사람과 정직한 대화를 해야 하는지, 어떤때에는 지적보다는 포용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떤 tone으로 충고나 질책이 필요한건지 등등…
참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major battle이 3의 항목에 있지 않고, 1과 2의 항목에 있는 것이라면,
비겁한 회피일수는 있겠으나,
3의 항목을 접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이나 frustration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것이고.

Not an Ideal Life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나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삶의 영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어그러짐은 그래도 둔채, 내 삶의 영역에 한해서만 “justice”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내게 공평하지 못하고,
왜 내게 이런일이 라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의 일부를, 내 삶으로 embrace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너무 쉽게 내 삶의 영역의 어그러진 부분을 곧게 펴보려는 시도는,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품고 사는 삶…..

내 탓이오

내가 관심을 가지고 follow 하는 사람들의 한계(?)일까.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 발언에 대해 분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twit 들을 만난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중 대다수는, 이런 입장을 취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조용기 목사님의 언급을 비판한다. (물론 나도 그렇고. ^^)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는 정말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기 목사님을 까대는 의도에는,
1. 나는 그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2. 기독교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대표되지 않는 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3. 평소 조용기 목사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에 이 기회를 빌어 마구 욕하고 싶어하는 마음

등등이 섞여 있지 않나 싶다.
내게도  역시 그 세가지가 모두 함께 있고.

그러나,
어쩌면 정말 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하는 자세는,
나도 조용기 목사님과 다르지 않다.
나도 조용기 목사님이 믿는 다고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을 믿고 있다.
나도  같은 기독교인이다.
라는 시작점에서 시작해서,
엎드려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나,
그런 기독교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다른 기독교인의 모습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조용기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 처럼,
일본인들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 분노가 표출되는 것을 보며… 섬찟한 느낌을 또한 갖게된다.

Would I….?

Fuller Seminary에서,
Stanley Hauerwas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강연의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다.
미주뉴스앤조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 찾은 것이었다.
(그의 책, Hannah’s child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몹시 피곤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그 강연의 상당 부분을 앉아서 들었다.

매우 심한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내와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title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잉태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보배가 삶에는 분명 있는 듯 하다.
만일, Hauerwas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의 파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고통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그는 그 고통의 길을 택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고통의 길을 통해서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런 고통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일하시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저 놀랍기만하다.

When Christianity is assumed to be an “answer” that makes the world intelligible, it reflects an accommodated church committed to assuring Christians that the way things are is the way things have to be. Such answers cannot help but turn Christianity into an explanation. For me, learning to be a Christian has meant learning to live without answers. Indeed, to learn to live in this way is what makes being a Christian so wonderful. Faith is but a name for learning how to go on without knowing the answers. That is to put the matter too simply, but at least such a claim might suggest why I find that being a Christian, makes life so damned interesting.
– Stanley Hauerwas

현학적이지 않은 신앙

언제부터인가,

내 신앙적 고민을 설명하려면 늘 매우 긴 배경지식을 설명해야 했다.



일종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설명,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 대비되는 사조에 대한 설명 등등.



그러다보니,

내가 길게 설명을 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내 고민 자체를 꺼내어 놓는 것이 힘들게 되어버렸다.



내 신앙의 여정에서…

나를 흥분시키고 자극시켰던

존 스토트, 프란시스 쉐퍼, 자크 엘룰, 김교신, 마틴 로이드-존스, 톰 라이트, 스탠리 하우어워스…



이분들로부터 배운 insight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학적이지 않은 신앙을 유지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아직은… 참 갈길이 먼듯 하다.








요즘 내 상태

두가지가 주로 감지된다.

첫번째로, 뭔가 click이 되었다.
예전에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계속 뭔가 잘 맞지 않아 서로 헛도는 느낌이 있었다면,
요즘은 자꾸 그 성령님께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낀다.
자전거 체인이 헛돌다가 철컥 하고 톱니가 맞아 돌아가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연초에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2011년 KOSTA 주제 묵상을 하면서… 
내 부족함에 대해 안타까움을 더 깊이 가지면서…
내게 일어난 현상이다.
이렇게 click된거… 놓치지 말아야 할텐데.
두번째로, 뭔가 약간 부족하다.
뭐라고 딱 찝어 얘기하긴 좀 어려운데…
뭔가 내 전투력이랄까 에너지 레벨이랄까 그런게 좀 떨어진 느낌이다.
첫번째에서 내가 언급한 현상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건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빵빵한(?) 전투력을 발휘하던 모습으로부터 많이 위축된 느낌이다.
‘불 받아야’ 할 때일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좀 조용히 더 다루시고 계신 걸까.

인위적 부양책

공동체를 섬기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clear한 message를 전달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강조를 사용한다거나… 인위적인 boost-up을 사용하면,
반드시 그것에는 그것에 따른 부작용/반작용이 따르는 것 같다.
인위적 경제부양책이 단기적으로는 경기를 부양시키는 것 같아도 결국 그 경제 자체를 취약하게 만들수 있는 것 같이 말이다.
인간적인 열정은 반짝 빛을 보는듯 해 보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열매를 여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내가 죽고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늘 My favorite verse 라고 생각해 왔던 것은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씀을 접했을때, 내가 받았던 충격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전혀 새로운 identity가 주어졌고, 이제는 내가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렸다는 발견을 하면서 고통스러울만큼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했던 것 같다.

요즘,
내가 죽는 일을 잘 못하고 있다.
내가 죽고 그분이 사는 것인데… 그게 the way to live 인데…

진정으로 burden을 지지않으면

이론과 말로 멋진 썰을 푸는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기도 하고,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지만,

그 이론을 삶의 burden으로 지고 사는 일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쉽게 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리더쉽은,
그 burden을 기꺼야 지고자 하는 자세와,
그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일이 수반되어야만 생기는 것 같다.

나를 ‘이론가’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때면…
어쩌면 내가 탁상공론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경고의 message는 아닌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