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결심

오늘은 설날이다.
뭐 여기 미국에서야, 설날 이야기를 한국 신문에서나 읽고 넘어가기에, 별로 기분도 나지도 않고, 내지도 않지만…

연초가 되면, 보통 blog에 거창하게,
새해의 결심들을 써놓곤 했었는데…

올해에는 다소 조용하게 그냥 몇가지 시도들을 하고 있다.
새해가 된지 거의 한달이 다 되어서, 뭔가 좀 퇴색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설날 기념으로 대충 정리해본다.

1. 성경을 가슴으로 읽는 시간을 갖기
2. 개인 성경연구 시간, 성경 통독 시간을 늘이기
3.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려는 마음이 들때마다 ‘은혜’를 묵상하기
4. Short-tempered 여서 감정 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passion’으로 포장하지 않기
5. 회사에서 내 시간을 희생해서 다른이들을 돕기
6. 잡담(!!!)을 생활화 하기 (특히 아내, 민우와)
7. 가능하면 수면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 적어도 6시간 반 이상 자기
8.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덜 드러내기
9. 너무 오지랖 넓게 살지 말기 -.-; (마치 나 혼자서 우주의 평화를 지키려는 듯 살지 말기)
10. 좋은 사람이 되기

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내가 처음 복음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처음 예수와 ‘관계’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두가지 중요한 혼란/변화가 내게 있었다.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가 여태껏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든 기초가 다 부정되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세계관의 변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내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기둥 자체가 무너져 버렸으니…
그리고 여태껏 내가 기둥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것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니…
정말 기뻤지만, 한편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정말 거의 미친듯이 공부했었다. 성경을 줄쳐가면서 읽고, 각종 신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심지어는 여러가지 성경공부 교재들을 사서 혼자서 답을 달며 참고서 풀듯 공부를 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말씀과 함께 사는 삶이 체득되었던 것 같다.

두번째로,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 모습 그대로의 ‘나’는 왜곡 투성이었다.
내가 그저 ‘괜찮다’, ‘정상이다’, 심지어는 ‘멋있다’고 여기던 내 모습은,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한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내 어그러진 모습을 고쳐나가는 일에 정신없이 매달렸었다.
잠깐 화가 나서 내 성질을 누르지 못하는 때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위해 나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이런 내 모습을 고쳐주시도록’ 참 많이 기도했다.
일상 생활 중에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내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보며 참 많이 가슴아파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성화 과정을 겪어가는 것을 배워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익숙해 지면서…
‘사명’, ‘비전’, ‘감동’, ‘뜨거움’, ‘개혁’… 등등과 같은 개념들이 점차 위의 내용들을 치환해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교회생활을 하면 할 수록 내가 성경을 통해서 만났던 진리의 태양빛보다는… 종교생활이 가져다주는 네온사인에 익숙해져가는 것을 경험했다.
한때는 그것이 성숙의 과정인줄 알기도 했으나…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알게된 것은, 
나는 처음의 순수했던 ‘신앙 생활’을 버리고 ‘종교생활’에 오염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코스타 집회를 통해서…
내게 주어졌던 그 순수한 열매들이 잘 회복되길…

그리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것이 그저 종교생활로 대체할 수 없는 얼마나 멋진 것인지…
보게되면 좋겠다.

현대 기독교가 제공하는 종교생활로부터 벗어나,
복음이 이야기하는 신앙생활로 회귀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제 들은 말 가운데에서…

어제 실험하면서 들은 어떤 설교 중에서 내가 깊이 마음으로 공감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부부가 되어 살면서, 자신의 뜻을 꺾어 배우자에게 순종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설교에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뜻과 자존심과 생각을 꺾지 않으면, 좀 더 확대된 공동체 생활에서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내용도 따라왔다. 

어떤 부부는 좀 더 많이 다투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부부 생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였다.

TV 광고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지극히 피상적인 행복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 부터 벗어나,
부부 관계라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촉구의 내용이었다.
(이런 표현을 그 설교자께서 바로 쓰시지는 않았지만… 내 말로 좀 더 paraphrase 하자면… ^^)

나처럼…늘…
내 뜻을 꺾어 아내에게 순종하기 더딘 사람에게…
참으로 아픈 설교였다. 

아니, 왜 이렇게 들들 볶으시는 겁니까!

박사과정 중에…
정말 일이 잘 안풀릴때…
도대체 왜 이렇게도 나를 들들 볶으시는거냐고 하나님께 참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보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딴지를 거시느냐고.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마음의 깊은 계곡에까지 내려가게 하시고서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려움, 좌절, 고난, 아픔, 절망, 실망, 안타까움, 두려움등등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이 곧은…

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다른이의 표현을 이해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 ‘자신’이 너무 강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야기하는 사람의 원래 의도를 곡해하거나 오해하여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해서 원래 의도를 변경시키거나 희석시키기도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정도의 곡해나 오해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그러한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미성숙한 사람은,
그렇게 오해/곡해한 것을 너무 쉽게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겸손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

KOSTA 주제 묵상

언제부터인가,

KOSTA 주제가 내 일년동안 묵상의 theme을 제공해 왔다.
아무래도 신경도 쓰게 되고, 생각도 더 많이 하게 되어서 인지 모르겠으나,
어떤땐 내가 의도하지 않는 데도 주제를 묵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금년에도 예외없이, 주제에 관련된 묵상들을 참 많이 하게 되고 있는데… 
다음의.. 어쩌면 당연한 몇가지가 최근 몇주동안 내 마음에 머물고 있다.
성화는 회심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
회심 (혹은 예수와의 만남)의 clear 한만큼 성화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
성화의 과정이 멈추었다고 느낄때, re-start 할 수 있는 point는 골고다 언덕과 빈 무덤.
성화는 성령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
내주시하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nudge 하시는 것을 잘 따르는 것이 key.
어느순간 종교생활에 익숙해져, 끊임없이 나를 이끄시는…. ‘수줍으신 하나님’ 성령님을 무시하는 순간 나는 off-track이 되어버림.
성화가 privatize 되는 길을 걷는다면, 이미 상당한 분량만큼 잘못된 길을 간 것이라는 것.
성화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성화의 주체를 지나치게 하나님으로 보는 입장도, 지나치게 사람으로 보는 입장도 건강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 보는 입장을 더 많이 강조해야 할 듯.
성화는, 즐거운 과정이라기보다는, 때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으나…
그 열매가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영광’ 이라는 것.
그렇게 때문에 고통을 통한 영광이라는 path를 embrace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릴때부터 모범생으로 자란 나는, 

나에대한 다른이들의 기대 (특히 부모님의 기대였겠지)를 충족시키는데 내 유년-청소년 시절을 다 보냈던 것 같다.
가령,
길거리를 가다가 떨어진 휴지를 집어오느라 내 주머니가 더러워지는 적도 많았고,
횡단보도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서 길을 건너지 않기 위해 직각으로 꺾어서 길을 건너는 때도 많았다.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때,
내가 그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문득 무겁게 느껴지게 되었다. 
좀 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탈을 시도할수도 있었겠느나,
지극히 소심한 나는 그저 속으로 앓았을 뿐이었다.
복음을 만났을때,
나는 마침내 내가 다른 이들을 만족시키는데 내 모든 것을 던져가며 살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내게 큰 자유를 가져다 주었는지 모른다.
더 이상 다른이들이 보는 나에 나를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이전의 lifestyle이 뿌리 깊게 내게 박혀있었던 차라,
나는 그것을 끊어내는 연습과 훈련을 참 많이 반복해야만 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다른이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시각으로부터는 참 많이 자유로와졌는데…
문제는 다른이들이 나를 ‘look up’하는 시각으로부터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참 많이 발견한다.
영적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내 일거수 일투족이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위치에 있게되자,
나는 내가 다른이들에게 비추어지는 모습이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계산을 하며 살게 되었던 것 같다.
동기가 악한 것이라고 볼수는 없으나,
복음이 이야기하는 자유는 분명 아니다.
내가…
다른 이런 관점에서,
다른이들의 시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와야 할지,
혹은 어떤 타협점이 있는 것일지,
아예 과감한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일지…
좀 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가 가리키는 그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내 목적일진대,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지금의 모습은 분명 많은 distortion을 안고 있는 것 같다.

I’m broken

처음 복음에 눈을 떴을때,

나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내가 눈을떠 보게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 삶의 근원부터 모든 것이 달라져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내가 스스로 편안하게 생각하던 내 모습이 내 진정한 자아가 아니었다.
복음의 밝은 빛이 어두운 나를 비추었을때, 나는 깨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후로 몇년동안, 그 깨어진 것을 고쳐가시는 주님의 일방적인 작업에 나는 정신없이 따라갔었다.
나중에 성경공부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은, 그것이 ‘성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1년 1월의 내겐, 그  역동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을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을 지켜내는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듯 하다.
It’s time for me to be renewed, refreshed, re-started…

내가 죽고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늘 My favorite verse 라고 생각해 왔던 것은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씀을 접했을때, 내가 받았던 충격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전혀 새로운 identity가 주어졌고, 이제는 내가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렸다는 발견을 하면서 고통스러울만큼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했던 것 같다.

요즘,
내가 죽는 일을 잘 못하고 있다.
내가 죽고 그분이 사는 것인데… 그게 the way to live 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