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곧은…

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다른이의 표현을 이해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 ‘자신’이 너무 강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야기하는 사람의 원래 의도를 곡해하거나 오해하여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해서 원래 의도를 변경시키거나 희석시키기도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정도의 곡해나 오해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그러한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미성숙한 사람은,
그렇게 오해/곡해한 것을 너무 쉽게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겸손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

너무 공부를 잘해서

내가 잘 아는 어떤 놈(!)의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참고로 내가 ‘놈’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정말 몇명 없다.)
정말 깊이 공감이 되었다.

주변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릴때 부터의 꿈이 박사였다는 이유만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의 drive 해가고 있다.

공부를 좀 덜 잘했더라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았을 사람들이,
너무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시각이 좁아져서…
이제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가 되었음에도 그렇게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나라고 과연 얼마나 그런 모습과 다를 것인가.

역사의 진보

최근, 존경하는 어느분의 설교를 들었다.
한동안 여러일로 쫓겨 설교를 한가하게(?) 들을 여유가 없었는데… 다소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보스턴 여행길에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설교중에,
성경의 세계관은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진보주의자’의 관점을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다
는 말씀이 나왔다.

정말 그럴까. 성경적 세계관에 따르면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까.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학문 활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을 이루시는 창조활동이다.
우리가 하는 정치 활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정치질서를 만드시고 발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런 관점은 그 설교하신 분이 다른 설교에서 말씀하신바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서 사회, 사상, 역사를 발전시키는 행위 역시,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유토피아를 이루려는 접근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계관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모든 노력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사의 진보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에 순종하는 행위가 아닐까.

사상과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켜 인권을 증진하고, 억압과 불평등을 개선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차별, 반칙, 부정등을 없애는 일들은 크리스천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심지어는 그것이 잘 안될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복음과 세계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세계관으로 복음을 해석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만드는 길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자신의 위치를 두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양극단의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을까.

세살 반 딸래미와의 대화

민우 : 아빠, 민우 지금 자전거 타고 싶어요

아빠 : 민우야, 지금은 밖에 비가와서 자전거를 타러 나갈 수 없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비가올때 민우가 자전거 타러 나가면 민우 옷이랑 머리랑 자전거랑 다 물에 젖어 척척해 지잖아.

민우 : 어, 왜 비가와?

아빠 : 음… 그건, 하늘의 구름에서 물들이 뭉쳐서 땅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만일 비가 땅에 오지 않으면, 나무들도 다 목말라 하고, 민우도 먹을 물도 없고 그렇게 되잖아.

민우 : 어, 왜요?

아빠 : 음… 그건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거든

민우 : 어, 왜요?

아빠 : 그런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살아가는데 물이 필요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그래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

민우 : 아빠, 왜 그래요? 응?

아빠 : ….

민우 : 아빠아~ 왜 그래요?

아빠 :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며) 민우야 그럼 아빠가 민우 아이스크림 줄까?

민우 : (까맣게 잊고) 예에~ ^^

********

몇가지 교훈

1. 최종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그냥 말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긴 하지만, 일종의 논리적 도피일수도 있다.

2.
그러나 최종 근원이 ‘하나님’ 이라는 것도 일종의 ‘전제’이다. 마지막에 “그냥 자연이 그런거야” 라는 자연주의적 대답을 한다고
해도 대화 흐름의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이긴 하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계관의 기초 전제를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내 사랑스러운 딸이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아빠로서 해야할 의무이다.

4. 세살 반짜리에게 과학과 신앙의 통합은 어려운 주제이다. 아이스크림이 훨씬 더 attractive 한 주제이다.

귀족 크리스천

인간의 사회는 어느 곳이 건 ‘계층’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부정적이지 않은 부류의 계층도 있으나 그 계층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 혹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성경은 이러한 계층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마서 13:1) 적극적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베소서 2:14)

계층은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계층은 교회의 건전한 성숙을 이루는 좋은 프레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에서 특정 ‘계층’을 이룬 사람들이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큰 제약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들은
‘귀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은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거나 종교 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어서 예배의 한 순서가 끝나면 그 다음
순서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신앙의 ‘레벨’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의 감격에 의지해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종교적 행위, 교회 봉사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그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때의 멸시는 물론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건덕(健德: 덕을 세움)을 중요시하는 교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담는다.) (마가복음 7:6-23)

이들은 또한 대부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가르치려 한다. 10여명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에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삶의 구체적 고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마치 유일한 성경적 정답인양 30분씩 충고를 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대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건에서 겪은 일들이나 인상 깊은
설교로부터 가르칠 거리들을 잘 준비해 놓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나 고민을 겪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저 한
사례(case)로 입력되어 자동적으로 해답을 출력한다.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떠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종교적
원론을 남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디모데전서 1:5-7)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번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모든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하는 것을 신앙의 절개로 여기고 흡족해 한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동역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들이 리더가 되지 않는 한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율법적 혹은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거부한다.
(에베소서 4:1-3)

이들은 매우 사역 중심적이다. 지역 교회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들은 탄탄한
종교행위의 이력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들과 인력을 동원해 사역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 한 영혼의 구원과 양육, 성장,
치유 등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은 집단적 성장을 위한 계획, 전략, 추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추종자’만이 요구될 뿐이다. 때로 자신이 거의 혼자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역
계획을 수립해 놓고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취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일꾼’을
찾는 많은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에게 인정을 받기 마련이고 소속된 신앙 공동체에서 단기간 내에 요직을 차지한다.
(누가복음 10:38-42)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대개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성공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 이처럼 좋은 배경은 자신의 신앙적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은 당사자의 잘못쯤으로 여기고 정죄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이들에게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들에겐 그저 성공을 향한 전진이 최상의 목표이다.

귀족 크리스천, 그저
이름만으로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단어가 한 절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러한 귀족 크리스천은 흔히 발견된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캠퍼스
모임 리더들 사이에서 어쩌면 귀족 크리스천은 더 강한 연대를 가지고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쩌면 ‘특권
계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귀족 크리스천은 더욱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털어내시며 우리를 섬기시지 않았는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으시며 왕이 종으로
섬기시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지 않았는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분은 이제 너희가 나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으라고 우리를 보내고 계시지 않은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KOSTA/USA-2001은 그래서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으로 느껴진다. 금년 코스타가 유난히 더 기대된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