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은데…

“복음”은 천사들도 보고 또 보아도 감탄하는 신비라고 했다. (벧전 1:12)
여기서 천사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표현은, 영어로 lust(음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라고 했다.
그만큼 중독성있으면서도 신비한,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전엔… 매우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형태이긴 했으나,
교회에 가면 늘 그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비록 그 복음의 내용이 매우 제한적이고, 다소 치우친 부분도 없지 않았고, 또한 대단히 환원주의적(reductionistic)한 것이긴 했으나,
정말 어떤 때는… 맨날 교회오면 저 얘기야… 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같다는 기억이 있다.
(그리고 놀라운건, 그 똑같은 얘기에 매주, 매일, 맨 앞에 앉아서 감탄을 하며 경청했던 할머니들이 계셨고.)

그런데,
요즘은 정말 그 복음의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기 어렵다.
복음에 헌신해라, 복음이 최고다, 하나님께서 잘 돌보아 주신다, 복음에는 이런 유익이 있다, 복음은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이다, 복음을 적용하면 이렇게된다.. 등등의 이야기는 하는데…
막상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 “복음설교”를 쌈빡하게(!!) 들어 본적이 언제였던가.
정말  복음설교를 제대로 하는 설교자를 꼽아보라면… 누구를 생각해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그 영광스러운 복음… 내가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은 그 복음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아…
내가 말씀을 열어… 자꾸 읽고 읽고 또 읽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복음의 이야기만…
한동안 내내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다 아는 얘기, 이미 다 들어서 통달한 이야기인것 같지만…
또 다시 들으면 또 다시 신비한… 그 복음.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에 덧붙이는 JP님에게 드리는 답글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글에 대해서 JP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을 이곳에 그냥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리해서 써봅니다.
kosta facebook page에서도 Jekyung Lee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JP 님과 비슷한 입장인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

JP 님,
깊이가 없는 글들을 그렇게 자주 읽어주신다니 참 많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과 생각을 올려주셔서 저로선 참 감사하고요.
가까이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만…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배우는 것은 저로선 참 즐거운 일입니다. ^^

자칫 제가 쓴 글이,
다시 읽어보니,
그리고 쓰신 덧글을 보니,
총체적(holistic) 복음의 입장이 아닌, 영혼구원이외에 다른 것들을 폄하하는 것 처럼 비추어질 수 있었겠다 싶군요.

독자들이,
이미 저와 여러가지 형태로 교분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가정해서 이 블로그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앞으론 좀 더 글쓰기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JP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이땅에서의 소망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초월적, 내세적 구원만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포기하며 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다만,
제가 이 글에서 쓴 context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은 지금 아래 쓴 것과 같은 상황을 머리속에 상상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다가 원래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가령,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해서 노숙자가 된 어떤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는 아내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해 버렸고, 중학생이었던 아들 하나는 친척집에 부탁했는데, 얼마전 그나마도 가출을 해서 행망이 묘연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정신적, 육체적…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총체적 복음”이라는 성경공부를 막 마치고 온, 연봉 20만불의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compassion’을 가지고 다가가서, 예수의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라면서 힘을 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고, 예수는 당신과 같이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나그네된 삶을 살면서 영원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고, 우리의 영혼이 이미 구원얻은 것에 함께 감사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아주 generous하게 1천불짜리 수표를 한장 써주고 갔습니다. 기도하겠다는 말도 함께 하면서요.

그냥 순전히 ‘요소(element)’로만 보면요, 이 젊은 변호사는 총체적 복음이 이야기하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것도 다루었고요, 전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담론도 다루었고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금전적인 도움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요,
막상 그 노숙자는,
너무나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서, 그 젊은 변호사가 한 이야기가 전혀 머리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1천불이라는 큰 액수의 check도 어떻게 써야하는 지도 모르는채, 흐지부지 며칠만에 탕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약자’인 그 노숙자에게, ‘강자’인 그 젊은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총체적 복음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멋진 사역을 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이 했던 일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요건’들을 적어놓은 check list에 check-off 한 것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변호사는, 그렇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노숙자의 상황에 대해 피상적 접근밖에 할 수 없었고, 정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무엇이라도 할 힘과 용기를 찾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전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막 그 삶을 벗어나 동네 목공소 견습생으로 일하는 어떤 청년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견습생은, 노숙자에게 다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노숙자의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함께 울었습니다.
한 30분을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지만, 그 견습생은 자신이 그 노숙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 더 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함께 울고는, 눈물로 그 노숙자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안된다고… 바로 2달전까지 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는데…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소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노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힘내는데 나도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에게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훈련센터가 있는데, 거기 왕복할 수 있는 버스값을 자기가 돈을 아껴서 조금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는 그렇게 힘을 내고 기운을 차려서, 그 견습생의 도움을 얻어 직업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늦은 시간이면 그 견습생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기도를 하기도 했고요.
조금씩 자신이 힘과 자신감을 되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요,
결국 그 노숙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총체적복음의 요소들’ 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견습생을 통해서 공급된 하나님의 은혜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은혜의 중요한 요소는,
Extra Nos (outside of us) 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없는 것이 밖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도의 도움이나, 실제적인 경제적 도움이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변호사도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인간적인)’ 제도의 도움이나 경제적 도움이 궁극적 해결이라기 보다는,
결국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Extra Nos)가 궁극적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약자를 돕고 섬겨야 하지만,
그들이 결국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흘러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로부터 혹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혹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유사 복음 (pseudo Gospel)에 몰입된채 자기만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위에서 언급한 젊은 변호사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도 아니고, 20만불을 벌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

제 고민과 생각이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 허술한 생각과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comment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JP님께 쓰는 답글의 형식으로,
저도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글을 써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빈구멍이 많을 줄 압니다. 계속 좋은 comment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

복음

어제는,
저녁식사후 잠깐 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민우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전혀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인가,
하나님께서 민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은혜를 얻은 사람이라면 죄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됨의 영광이 어떤 것인가.

나도 민우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KOSTA/USA-2010 conference를 마치고 (3)

복음

지난 두어달 동안 내가 많이 ‘확장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복음의 개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점검을 하고 있던 차였다.

현대 기독교에서 아주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사유화(privatization)하려는 시도에 있다고 여기고,
복음의 공동체성, 복음이 가지는 거대담론 등에 매우 깊이 빠져 있었다.
영혼 구원에 머무르지 않는 구원, 전 피조세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구원의 의미에 대해 꽤 많이 곱씹으며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두어달 동안에는 내가 취하고 있던 그 접근법을 여러각도로 재점검하고 있던 차였다.
복음이 사유화(privatization)된 것은 복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복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화(personalization)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전 세계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속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은 결국 개인적(personal)인 속성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동안 빠져 있었던 N.T. Wright에 대해서도, 결국 그분이 이야기하는 ‘righteousness'(의), ‘justification'(의롭게 됨)의 개념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면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이번 집회에서 다루어졌던… old gospel, penal substitution을 강조하는… 보혈의 공로로 구원얻는 그 복음, 그 복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되는 그 복음을 나는, 다시 한번 주목하여 바라보게 되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설교를 통해… 그리고 내가 곱씹는 사색과 사고를 통해…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던가, 그런데 그 죄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다시 깊이 주목하여 잠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가 어쩌면…
그렇게 복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등은…
정말 복음의 core라기 보다는 그보다 더 넓은 영역을 복음에 넣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내 개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감격에 대해 망각한 채,
사변적이고… 소위 ‘세상의 이상주의에 아부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접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인데…
마치 그것을 내가 이루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Tim Keller나 Don Carson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new legalism이라고 지칭했던 것이 어째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다고 복음의 공동체성이나 거대담론등을 포기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다. ^^)

들어도 들어도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아무리 여러번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복음설교를 듣고 싶다.

복음을 사유화하지 않지만 개인화시켜주는,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을 모두 보여주는,
짧고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 복음의 핵심과, 장대한 스케일로만 설명이 가능한 복음의 내러티브를 모두 담는,
처절한 죄의 본성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구원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의 개인적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의 균형이 잡혀 있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복음 설교라면,
1만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텐데…

복음은 세상을 뒤집는 가치

복음은 세상을 뒤집는 가치이다.
그러나 현대에 그 복음은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자크엘룰의 이 말이 요즈음 더 뼈속 깊숙히 느껴진다.

복음을 아편으로만 여기며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복음이 진정으로 세상을 뒤집는 가치임을 설득할수 있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마치 아편중독자들같이,
종교의 아편에 빠진 이들에게… 복음을 보여줄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내게 처음 다가왔던 ‘환상’

나는 소위 ‘환상’같은 것을 보는 신비로는 경험들이 거의 없다.

그런데,
91년 어느 봄날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고속도로 안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채로, 온 몸을 깨어부수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어 가며 절규하시는 모습이 강하게 머리 속을 지난 일이 있었다.
(꼭 환상이라고 하기엔… visual한 image가 너무 약했고… 그렇다고 단순한 상상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생생하게 그 모습이 그려졌다.)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고 계셨다.

“아버지, 이 죄를 오승이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오승이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황급히 군중을 보았다.
그곳에는 벌건 얼굴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는 이런 시즌이 되면,
나는 매년 그때 그 ‘환상’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

때때로 철없는 뒷 모습 당신께 보이며
추억이 손짓하는 옛 숲을 향해 달려가고 싶지만
그러나 이제껏 당신처럼 날 사랑하신 이가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날 위해 죽으신, 당신을 나는 이제 이렇게 부르죠
나.의.주.님.

(하덕규의 지난 날에게)

복음과 세계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세계관으로 복음을 해석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만드는 길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자신의 위치를 두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양극단의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을까.

포스트모던 세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소위 ‘신세대’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특징은 포스트모던적이고.

오랬동안,
나는 내 모더니즘식 접근법이 ‘정공법’이고
포스트모던적 접근법은 ‘꽁수’라는 생각을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tool은 모더니즘식 논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