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에 덧붙이는 JP님에게 드리는 답글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글에 대해서 JP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을 이곳에 그냥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리해서 써봅니다.
kosta facebook page에서도 Jekyung Lee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JP 님과 비슷한 입장인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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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님,
깊이가 없는 글들을 그렇게 자주 읽어주신다니 참 많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과 생각을 올려주셔서 저로선 참 감사하고요.
가까이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만…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배우는 것은 저로선 참 즐거운 일입니다. ^^

자칫 제가 쓴 글이,
다시 읽어보니,
그리고 쓰신 덧글을 보니,
총체적(holistic) 복음의 입장이 아닌, 영혼구원이외에 다른 것들을 폄하하는 것 처럼 비추어질 수 있었겠다 싶군요.

독자들이,
이미 저와 여러가지 형태로 교분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가정해서 이 블로그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앞으론 좀 더 글쓰기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JP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이땅에서의 소망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초월적, 내세적 구원만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포기하며 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다만,
제가 이 글에서 쓴 context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은 지금 아래 쓴 것과 같은 상황을 머리속에 상상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다가 원래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가령,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해서 노숙자가 된 어떤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는 아내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해 버렸고, 중학생이었던 아들 하나는 친척집에 부탁했는데, 얼마전 그나마도 가출을 해서 행망이 묘연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정신적, 육체적…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총체적 복음”이라는 성경공부를 막 마치고 온, 연봉 20만불의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compassion’을 가지고 다가가서, 예수의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라면서 힘을 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고, 예수는 당신과 같이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나그네된 삶을 살면서 영원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고, 우리의 영혼이 이미 구원얻은 것에 함께 감사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아주 generous하게 1천불짜리 수표를 한장 써주고 갔습니다. 기도하겠다는 말도 함께 하면서요.

그냥 순전히 ‘요소(element)’로만 보면요, 이 젊은 변호사는 총체적 복음이 이야기하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것도 다루었고요, 전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담론도 다루었고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금전적인 도움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요,
막상 그 노숙자는,
너무나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서, 그 젊은 변호사가 한 이야기가 전혀 머리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1천불이라는 큰 액수의 check도 어떻게 써야하는 지도 모르는채, 흐지부지 며칠만에 탕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약자’인 그 노숙자에게, ‘강자’인 그 젊은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총체적 복음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멋진 사역을 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이 했던 일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요건’들을 적어놓은 check list에 check-off 한 것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변호사는, 그렇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노숙자의 상황에 대해 피상적 접근밖에 할 수 없었고, 정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무엇이라도 할 힘과 용기를 찾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전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막 그 삶을 벗어나 동네 목공소 견습생으로 일하는 어떤 청년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견습생은, 노숙자에게 다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노숙자의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함께 울었습니다.
한 30분을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지만, 그 견습생은 자신이 그 노숙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 더 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함께 울고는, 눈물로 그 노숙자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안된다고… 바로 2달전까지 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는데…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소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노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힘내는데 나도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에게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훈련센터가 있는데, 거기 왕복할 수 있는 버스값을 자기가 돈을 아껴서 조금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는 그렇게 힘을 내고 기운을 차려서, 그 견습생의 도움을 얻어 직업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늦은 시간이면 그 견습생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기도를 하기도 했고요.
조금씩 자신이 힘과 자신감을 되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요,
결국 그 노숙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총체적복음의 요소들’ 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견습생을 통해서 공급된 하나님의 은혜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은혜의 중요한 요소는,
Extra Nos (outside of us) 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없는 것이 밖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도의 도움이나, 실제적인 경제적 도움이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변호사도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인간적인)’ 제도의 도움이나 경제적 도움이 궁극적 해결이라기 보다는,
결국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Extra Nos)가 궁극적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약자를 돕고 섬겨야 하지만,
그들이 결국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흘러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로부터 혹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혹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유사 복음 (pseudo Gospel)에 몰입된채 자기만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위에서 언급한 젊은 변호사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도 아니고, 20만불을 벌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

제 고민과 생각이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 허술한 생각과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comment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JP님께 쓰는 답글의 형식으로,
저도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글을 써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빈구멍이 많을 줄 압니다. 계속 좋은 comment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가령,
집이 부자인 친구와, 집이 가난한 친구가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집이 부자인 친구는 여행 경비를 넉넉하게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대개의 경우 자세도 더 generous 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넉넉했기 때문에 stingy 한 attitude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더 마음도 넉넉하고, 너그럽다.

집이 가난한 친구는 여행경비를 빠듯하게 준비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늘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쫀쫀한 생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가난한 친구는,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있다.
부자 친구의 부 자체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친구가 현실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주어진 상황을 take advantage 하려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자친구가 이 가난한 친구를 치사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데 있다.
부자친구는 이 가난한 친구가 왜 자기처럼 너그럽게 자신의 것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느냐고 궁시렁 거린다.
함께 조금씩 갹출해서 음식을 사먹거나 할 때에도 자신이 늘 더 많이 내어 놓는 것이 마음이 상한다.
가난한 친구가 어쩌도 조금 더 음식을 먹는 것 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서러움까지 생긴다.
unfair 하다, 저 친구는 너무 짜다, generous하지 않다, 사랑이 없다, 심지어는 그 사람의 인격과 integrity까지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친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비굴해지는 것일까? 불쌍하게 보여서… 그래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내어놓도록 해서 함께 가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와 맞서서 싸우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가 보지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라도 항변하면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나누지 않는 것에 폭력적으로 다가가야 할 것인가? 어차피 함께 가는 마당에… 결국 우리는 나누어야 한다면서?

나는, 늘 나를 ‘강자’의 입장에 두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로 나는 ‘기득권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말 그 ‘약자’의 신발을 신고 상황을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관찰하는 미국과 한국 사회의 상황을 보며…
내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하여…

느닷없이 이런 부류의 생각을 해본다.

약자가 되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은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기도 한다.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감내해야하기도 하고, 불안감과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미 너무 강자여서…
그저 강자로 사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어쩌다 내가 약자로서 노출되게 되거나…
내가 약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는 듯 하다.

회사에서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 쉽게 자존심 상해 한다던가,
작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한다던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예수께서하신 이 선언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이 있는 세상이 왔다는…
이제는 이전의 세계관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는…
엄청난 것임에도,

오히려 내가 강하기에 그 선언의 깊이를 인식하고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Thanksgiving을 보내면서,
내게 감사가 사라진 메마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약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적어도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다소 편애가 있다고 보일 정도로….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강자의 웃음보다는 약자의 눈물에 더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너무 ‘강자’이다.

이런 시각에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내 강함을 정말 <<completely>> 약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