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가령,
집이 부자인 친구와, 집이 가난한 친구가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집이 부자인 친구는 여행 경비를 넉넉하게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대개의 경우 자세도 더 generous 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넉넉했기 때문에 stingy 한 attitude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더 마음도 넉넉하고, 너그럽다.

집이 가난한 친구는 여행경비를 빠듯하게 준비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늘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쫀쫀한 생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가난한 친구는,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있다.
부자 친구의 부 자체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친구가 현실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주어진 상황을 take advantage 하려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자친구가 이 가난한 친구를 치사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데 있다.
부자친구는 이 가난한 친구가 왜 자기처럼 너그럽게 자신의 것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느냐고 궁시렁 거린다.
함께 조금씩 갹출해서 음식을 사먹거나 할 때에도 자신이 늘 더 많이 내어 놓는 것이 마음이 상한다.
가난한 친구가 어쩌도 조금 더 음식을 먹는 것 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서러움까지 생긴다.
unfair 하다, 저 친구는 너무 짜다, generous하지 않다, 사랑이 없다, 심지어는 그 사람의 인격과 integrity까지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친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비굴해지는 것일까? 불쌍하게 보여서… 그래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내어놓도록 해서 함께 가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와 맞서서 싸우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가 보지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라도 항변하면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나누지 않는 것에 폭력적으로 다가가야 할 것인가? 어차피 함께 가는 마당에… 결국 우리는 나누어야 한다면서?

나는, 늘 나를 ‘강자’의 입장에 두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로 나는 ‘기득권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말 그 ‘약자’의 신발을 신고 상황을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관찰하는 미국과 한국 사회의 상황을 보며…
내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하여…

느닷없이 이런 부류의 생각을 해본다.

약자가 되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은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기도 한다.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감내해야하기도 하고, 불안감과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미 너무 강자여서…
그저 강자로 사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어쩌다 내가 약자로서 노출되게 되거나…
내가 약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는 듯 하다.

회사에서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 쉽게 자존심 상해 한다던가,
작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한다던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예수께서하신 이 선언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이 있는 세상이 왔다는…
이제는 이전의 세계관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는…
엄청난 것임에도,

오히려 내가 강하기에 그 선언의 깊이를 인식하고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Thanksgiving을 보내면서,
내게 감사가 사라진 메마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