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uld I….?

Fuller Seminary에서,
Stanley Hauerwas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강연의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다.
미주뉴스앤조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 찾은 것이었다.
(그의 책, Hannah’s child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몹시 피곤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그 강연의 상당 부분을 앉아서 들었다.

매우 심한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내와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title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잉태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보배가 삶에는 분명 있는 듯 하다.
만일, Hauerwas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의 파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고통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그는 그 고통의 길을 택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고통의 길을 통해서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런 고통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일하시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저 놀랍기만하다.

When Christianity is assumed to be an “answer” that makes the world intelligible, it reflects an accommodated church committed to assuring Christians that the way things are is the way things have to be. Such answers cannot help but turn Christianity into an explanation. For me, learning to be a Christian has meant learning to live without answers. Indeed, to learn to live in this way is what makes being a Christian so wonderful. Faith is but a name for learning how to go on without knowing the answers. That is to put the matter too simply, but at least such a claim might suggest why I find that being a Christian, makes life so damned interesting.
– Stanley Hauerwas

아니, 왜 이렇게 들들 볶으시는 겁니까!

박사과정 중에…
정말 일이 잘 안풀릴때…
도대체 왜 이렇게도 나를 들들 볶으시는거냐고 하나님께 참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보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딴지를 거시느냐고.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마음의 깊은 계곡에까지 내려가게 하시고서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려움, 좌절, 고난, 아픔, 절망, 실망, 안타까움, 두려움등등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C 형제 이야기

지난 2009년 KOSTA/USA의 주제는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였다.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깨달음이 있었던 주제였다.

나는 비록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주제를 몇개월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내가 이해하는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한껏 깊고 넓게하는 경험을 하였다.

특히 2009년의 주제문은 참 호소력있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를 실제적인 삶의 영역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C 형제는,
지난 2009년 주제문 초안을 잡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몇 사람중 한 사람이다.
지난 Chicago conference의 conference design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C 형제가,
최근 닥쳐온 경제위기의 여파로 실직했다.

H visa status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조만간 미국에서 job을 잡지 못하면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을 해야할 지경에 쳐해있다.
귀국을 한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꽤 들었기 때문에 쉽게 아무렇게나 job을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고 한다.
여러가지로 직장을 얻기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정말 이상하리만치 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이상하게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깊이 개입하고 계신 것일텐데… 한편 기대가 되지만 역시 주된 마음은 답답함이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이 주제를 정했을때, 이 주제문을 써내려가던 순간에…
우리는 이렇게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쳐한 이들에게 소망의 근거를 이야기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던 이가 바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렇기에,
C 형제의 어려움은 단지 그 형제만의 어려움이 아닌 듯 하다.

하나님께서…
KOSTA/USA를 섬기는 이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외치고 기도하고 주장했던 그것이 정말 너희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C 형제가 매우 벅차고 힘들게…
그러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을 보며…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C 형제의 삶과 기도와 땀과 눈물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앞으로의 삶에 큰 기대를 건다.

고난을 활용(?)하기

어그러진, 비뚤어진 창조 질서 내에 있는 사람들은…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피조세계가 처해있는 framework 자체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고난의 영향아래 있게될 수 밖에 없다.

고난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고난을 활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다.

몇가지 생각해보면…

1. 고난을 통해 비뚤어지지 않은 창조질서에 대한 목마름을 더 깊이 인식한다.
2. 고난의 근원이 이미 복음 안에서 해결되었음을 감사한다.
3. 고난을 겪는 형제-자매들의 아픔에 동참한다.
4. 아직 고난의 의미와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겪는 고난의 내용을 다른이에게 이야기해준다.

최근,
개인적인 고난을 겪고 있는…
그러나 그 고난을 개인적으로만 볼 수 없는 그런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를 생각하며,
그 형제의 영광스러운 싸움에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민우에게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다.

요즈음 계속 교회 정착을 못하고 헤메는 바람에,
민우도 주일학교를 정착하지 못하고 헤메고 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민우와 함께, 둘이서 ‘성경공부’를 했다! ^^
본문은 디모데후서 1장이었는데…

자그마치 40분동안이나 함께 했다. (기특한 민우… ㅋㅋ)

core message는,
복음을 위해 사는데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 그리고 그 고난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아주 powerful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민우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나님께서 민우를 사랑하시는데 왜 고난을 주시느냐…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기쁨을 누린다고 했는데 고난이 어떻게 기쁠 수 있느냐…

내가 민우에게 해줄수 있는 말은,
민우가 더 커서 생각과 마음이 더 성숙하면 알게 될거다.
하지만 나중에 고난을 겪게 되면 이 말을 꼭 기억해라.
고난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길가운데 하나라는걸.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민우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뭐 이정도 였다.

민우는,
아주 밝고,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사랑 많은 그런 아이이다.
이런 아이로 키워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한다.

그러나 한편,
이 아이에게…
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 영적 목마름, 고난 등과 같은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늘 마음 한쪽에 가지고 있는 부담이다.

고난에 관하여 (final)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너무나 당연하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이 문장이,
초등학생이 가볍게 이야기해면 그저 ‘예쁜 이야기’에 그치지만,

깊은 고난을 통해 귀한 열매를 맺은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 말 자체에 엄청난 은혜가 실리게 되는 듯 하다.

고난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내가,
감히 고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부끄러운일이 될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대어, 내 사랑하는 이의 고난을 보며….
그와 내 자신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한번 정리해 본다.

앞으로 몇년후에 이 글들을 다시 읽으며…
그때 내가 이해했던 것이 그렇게 천박한 수준밖에 되지 않았구나…
하며 얼굴을 붉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고난에 관하여 (8)

성혁아,

최근 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같은 교회를 다니며 성장하던 시절의 너로만 너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네가 늘 그저 어린아이와 같기만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난 참 네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너희 아버지가 예전에 그렇게도 판사가 되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억울하게 판사가 될 기회를 놓쳐 개인 변호사로 개업하신 후 늘 그때 판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네가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정확하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매우 억울하게 판사 임용 직전에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도 엉뚱한 오해에 연루되어서.)
게다가 그런 상황 속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법조인의 세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 네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더욱 많이 분개하고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너를 통해 네 아버지께서는 대리만족도 많이 느끼고 계셨을텐데 말이야.

나는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 뭐 그런 것은 전혀 믿지 않는 단다. 그런 argument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미신에 가까운 것이지.
그러나 나는 모든 가족에는 그 가족이 짊어지고 대대로 물려주고 있는 악습, 잘못된 가풍, 가치관 등이 있다고 생각해.

혹시, 45년여 전에 너희 아버지에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네가 교회 소그룹이 끝난 후 친교실 구석에 앉아 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분노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때, 나라도 그렇게 억울했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만일 그런 억울한 일들을 보상받는 방법이, 나 대신 자녀가 못다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라면 너무 shallow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가지려는 꿈, 더 성취하려는 꿈은 자꾸만 커지게 마련이고, 대를 이어가면서 네 가족 안에서 계속해서 못다이룬 꿈을 그 자녀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 이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성취, 명예, 성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풍에는 여러가지 순기능이 있지만, 그것에 따른 역기능이 역시 매우 크니까… 만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할텐데 말이야…
대를 이어가면서 도무지 그것을 끊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 하고 계신데 말이야.., 만일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 엄청난 일을 이룰 한 사람을 어떤 가문에서 발견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어떤 일들을 하실까?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모든 관심을 쏟으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영향력을 받게 하시고, 훌륭한 훈련과 교욱도 공급하셔서… 정말 대를 이어온 그 폐습을 끊어 낼 수 있는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중에 그 일을 이룬 사람의 마음에, 성공와 명예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JOY를 허락하시지 않을까?

개인의 성취와 영예가 겨우 당대에 그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 가시는 선한 영향력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의 시간 scale을 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시원한 생수와 같은 것이 되지 않니.

선교사로 나가 있는 네 형과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있는데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네가 해볼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나님께서는 널 그렇게 대단하게 보신다는 말이 아닐까. 너라면 이 일을 할 수 있어… 너라면 겨우 네 개인의 성공과 영예와 성취, 그리고 기껏해야 네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수준의 그런 삶의 scale을 벗어나서 훨씬 더 넓고 큰 scale의 삶을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네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너를 위해 기도할때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때는 무겁고 힘든 마음이다가도 조금만 기도를 하면서 그분의 마음에 함께 마음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너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대로 마음이 벅차진단다.

성혁아,
신앙의 성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가는 과정이란다.
신앙의 성숙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것이지.
나는, 하나님께서 너를 그 심오하고도 풍성한 세계로 이끌고 계심을 본단다.

넌 잘 해낼꺼야. I’m truly proud of you!

with Peace of Jesus,
승호형이

고난에 관하여 (7)

때로 고난의 기간은 짧을수 있지만,
자주 고난을 내면에서 process 하는 기간은 매우 길수도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얻어진 열매가 무엇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행동이 아닐까 싶다.

마치 오래 뼈를 고와 곰탕을 끓여내는 과정과 같이,
좋은 한약을 오래 달이는 과정과 같이,
하나님께서 삶에 허락하신 어려움을 깊이 곱씹으며 성장과 성숙의 열매로 삼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때로 그런 과정중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던 선물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 성품의 진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 나오는 것이다.

고난에 관하여 (6)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중,
애매한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자주 본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만난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애매한 고난을 깊게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 고난을 매우 건강하게 승화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의 현장에서 애매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경우엔,
하나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 연속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는 일들도 보았다.

고난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을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다른이들의 고난에 대한 말할수 없는 compassion을 갖게한다.

훌륭한 spiritual leader들에게 고난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고난에 관하여 (5)

고난을 겪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쓴 뿌리만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증오, 복수심, 모멸감, 패배감만을 갖는 일들을 본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맺어져야 할 건강한 열매들과, 지금 언급한 부정적 쓴 뿌리가 섞여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경우는,
부정적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고난의 열매로 치장하고 포장하는 경우이다.
고난을 통해 자신이 성숙한 것 같이 훗날 이야기 하지만 막상 성숙했다기 보다는 쓴뿌리만을 마음 속에 갖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겪는 중에,
고난을 다 겪고 난 후에,
건강한 조언과 가이드를 받으며 그 일들을 건강하게 곱씹을 기회가 있다면 이런 일들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