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담은 찬송

내가 좋아하던 예전 찬송가 150장(새 찬송가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을 혼자 기타를 치며 집에서 부르다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보니, 바로 그 찬송을 함께 불렀다.

워낙 한국말로 부르는 찬송이 익숙해서인지,
원곡은 분명 영어일텐데도, 영어로 부르니까 약간 ‘맛’이 덜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참 마음을 담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여러 부활절 찬송을 부르면서 그 가사들을 생각해보니,
정말 깊은 ‘교리’를 담은 찬송들이었다.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소망이 되는지, 예수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그 소망은 우리 삶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 우리는 무엇일 기대할 수 있는지 등등.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즘 만들어진 찬양곡들은 그런 곡을 찾아보기 참 많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얕은 감성만을 자극하는 찬양 노래가 아니라,
깊은 신학을 함께 담은 찬양 노래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불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활절 묵상

부활절에는,
우리가 얼마나 당당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마음껏 소리높여 외쳐보자!

Oh Death, where is you victory?
Oh Death, where is your sting?
… thanks be to God, who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인류를… 나를 붙들어놓고 있던 ‘죽음’에게, 이제는 덤벼보라고 당당하게 나서며 그 죽음을 깔보며 조롱하는 날이 되도록 해보자!

죄의 권세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졌음을 목청이 터져라 외쳐보자!

미국에서는, 부활절과 성탄절 같은 절기에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부활절, 성탄절에는 예배에 늘 자리가 부족하다.
우리 가족은 다른이들을 배려하다는 차원에서, 어제(토요일) 저녁에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왔다.
뭔가 ‘맛’이 별로 안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많이 있긴 했으나…
막상 예배를 드리며 참 깊이 예배의 감격에 빠졌었다.

부활절 예배를 한 4-5시간 드리면서,
마음껏 죽음과 사탄에 대해 조롱하고,
마음껏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를 감사하고,
마음껏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면 좋겠다… 싶었다.

1시간쯤 진이 빠지도록 찬양하고,
1시간쯤 깊이 기도하고,
1시간쯤 설교 듣고,
그리고 또 한 1시간 찬양과 기도하고,
또 1시간 말씀 더 듣고,
그리고는 다 함께 밖에 나가서 Christ is Risen! 이라고 좀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런 부활절 예배 한번 드리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만큼 예배가 감사했다.

들어도 들어도 또 들어도…
부활의 백성이 이제 되었다는 감격은…
정말 심오한 깊이가 있는 듯 하다.

 

고난주간 묵상 – 토요일

토요일
무덤에 계심 (마태복음 27:62-66)

고난주간에서, 토요일은, 늘 애매하다.
금요일까지는 묵상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고난을 묵상하기도 하지만,
토요일이 되면, 아직 부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금요일의 장엄함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한편 지치기도 하고, 한편 지루하기도 하고, 한편 어색하기도 하다.

지난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주일 예배 설교는 이런 어색함을 싸악~ 씻어주는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직 토요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아직은 부활의 감격이 완성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금요일의 고통이 잊혀지지도 않은.
그렇지만, 우리의 identity는…. ‘토요일의 사람들’이 아니라, ‘일요일의 사람들’ 이다.
부활절의 사람들인 것이다.

지루한 부활절 전날 토요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금요일

금요일
공회에서의 심문, 빌라도의 심문 (마태복음 26:50-27:31, 마가복음 14:53-15:20, 누가복음 23:1-23:25, 요한복음 18:12-29)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장사됨 (마태복음 27:32-27:62, 마가복음 15:21-15:47, 누가복음 23:26-56, 요한복음 19:16-19:42)

가상칠언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2.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복음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6.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

주님께서, 만왕의 왕께서, 가장 추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죄의 형벌을 다 뒤집어 쓰시고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진노를 받으셨다.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7마디의 말씀중, 특별히 첫번째 말씀이 그토록 내 마음을 후벼판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들을 위해 채찍에 맞고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계신 중인데도,
막상 그 수혜자들은 그 예수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처형을 감수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있었던 것은,  대못이 아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있었던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나의 바람은 이것이다.

나는 매일,
그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군중 속에 있는 내 모습을 새롭게 보기 원한다.
나는 매일,
그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 처형틀에 달려있는 예수의 모습을 새롭게 보기 원한다.
나는 매일,
그 처형틀에서, 이전의 내 자아가 이미 못박혀져 버렸을을 새롭게 보기 원한다.
나는 매일,
그 처절한 절규 속에서도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저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의 떨리는 기도소리를 새롭게 듣기 원한다.
나는 매일,
그 처참하고 피비린내나는 십자가 사형장에서, 모든 죄에 대한 궁극적 심판이 이루어졌음을 새롭게 가슴떨리게 깨닫기 원한다.
 
매일, 그 십자가의 사랑 이외에는,
내 삶에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기 원한다.
내… 평생…
그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때까지… 

고난주간 묵상 – 목요일

목요일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심, 다락방 설교, 대제사장의 기도 (마태복음 26:17-35, 마가복음 14:12-31, 누가복음 22:7-38, 요한복음 13:1-17:26)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잡히심 (마태복음 26:30-50, 마가복음 14:26-52, 누가복음 22장 39-53절, 요한복음 18:1-11)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리고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예수께서 마음 속에 가지신 간절함이,
목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기술한 복음서의 본문에 잘 드러난다.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락방 설교에 이은 대제사장의 기도는,
언제 읽어보더라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할 것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 주시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까지 비장하실까.
특히 대제사장의 기도를 읽어보면, 마치 영영 그들을 떠나는 것 같이 기도를 하고 계시다.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본문에서도 역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영영 다시는 못볼것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내가 다 풀어낼 수 있을것 같지는 않지만,
몇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1. ‘옛시대’의 마지막을 마무리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양쪽 시대의 연속성/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때의 장엄함은 많은부분, ‘옛시대’가 간다는 사실과, ‘새 시대’의 위대함에 기인한다.

2.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케노시스), 십자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에 대한 clear한 그림 자체를 다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셨다.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것은 맞지만, 그분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습과 같이 되시는 ‘비움 (emptying himself)’의 상태에 계셨으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아는 것 조차도 surrender 하신 상태였다. 따라서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인 장엄함에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3. 예수께서는, 심지어 죽음 이후의 일을 아셨다 하더라도, 당장 경험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진노, 아버지 하나님과의 분리의 중압감이 말로 다 할수 없이 크셨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의 fellowship을 가지셨던 분인데,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죄에대한 진노와 심판을 온 몸으로 받으신다는 것이 우리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이다.

글쎄…
나로선 어떤 한가지 입장을 선뜻 취하고 나머지를 버리거나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고난주간에, 내가 곱씹어 생각해보는 것은 이것이다.

그분은,
바로 그 목요일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아픈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위대한 죽음이기도 하였다.

그 죽음 이전 마지막 시간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친구였던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다.
그리고 마지막 그들에게 주고 싶은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부어주고 계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저 종교적으로 제자들을, 사람들을, 세상을, ‘사랑’하셨던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정말 제자들을, 사람들을, 세상을, 좋아하셨다.
함께 있는 것을 즐기셨고, 동행하기를 원하셨다.
잠시 떨어져 못보게 되는 것을 가슴아파하실만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그것은 정말 미스테리이다.
사랑받을만한 존재도 아닌데… 그분이 그 모든 것을 버려가며 건져야할만한 존재가 결코 아닌데…

이제,
바로 그 궁극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금요일로 향하신다…

고난주간 묵상 – 수요일

수요일
다른 기록은 없고 예수께서 물러나셔서 기도/휴식 한 것으로 생각됨
가룟유다의 배신 (마가복음 14:1-11) – 이 본문은 화요일의 사건으로 생각되기도 함

나를 그토록 이 신앙 안에 붙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새 시대에대한 소망일까?
구원에 대한 감격일까?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헌신일까?

물론 그것들이 다 맞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이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절규하시면서까지 전 인류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
힘든 대학원 생활 중에…

고난주간에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점심시간에 공터나 주차장 한 구석에 가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로 흐느껴 울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의미에서 보면,
meta-narrative를 강조하는 emergents의 사조를 일종의 legalism이라고 지적했던 Tim Keller의 주장에 참 공감이 가기도 한다.

고난주간 묵상 – 화요일

화요일
무화과 나무가 마름 (마태복음 21:20-22, 마가복음 11:20-25)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 경고 (마태복음 21:23-22:14, 마가복음 11:19-12:12, 누가복음 20:1-8, 12:1-12)
바리새인과 논쟁, 바리새인 책망 (마태복음 22:15-23:39, 마가복음 12:13-44, 누가복음 20:26-21:4)
밀알의 비유 (요한복음 12:20-36)
유대인의 배척,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 (마태복음 24:1-14,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5-38, 요한복음 12:39-50)

They don’t get it! They simply don’t get it!
도대체, 사람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종교지도자들은 더더욱 그랬다.

어릴때엔,
그저 ‘신흥 종교’의 새로운 지도자인 예수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들에게는 정말 너무나도 많은 clue들이 주어져 있었다!

내가 늘 읽을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찡~ 하고 아파오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1장 11절. 
그가 자기 땅에 오셨는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고집스럽게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쏟아내어 놓는 공격과 반항과 거부를 모두 받으시며…

묵묵히 묵묵히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고 계신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며,

그러나 바로 그들을 위해 제물이 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다.


고난주간 묵상 – 월요일

월요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 (마태복음 21:12-19, 마가복음 11:12-19, 누가복음 19:45-48)

최근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율법주의가,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폐쇄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아직도 이전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매우 강력한 언어로 경계의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예수께서 월요일에 성전 청결을 하시면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이방인의 뜰 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종교권력과 결탁한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 뿐 아니라 만민이, 정말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곳에서,


자기들만의 폐쇄적 공동체를 만들어버린, 그것도 부패한 공동체를 만들어 버린 것을 보시며,


예수께서는 참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진정으로 창조주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새로운 시대,

정말 죄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 가능해진 새로운 시대,


깨어지고 어그러진 피조세계 질서의 회복이라는 희망이 마침내 가능해진 시대,


그리고 모든 인간적 장벽이 사라지고  만민(all nations)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부어지는 시대.


그리고 그 웅대하고 광대한 계획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시고 부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 새로운 시대를 살게 하시는 그런 시대. 

예수께서는, 

그 광대한 계획 안에,


나 같은 사람도 두시고…


그것을 위해 이제 십자가 처형을 향하여 한걸음씩 다가가고 계신다. 

고난주간 묵상 – Palm Sunday

일요일
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17, 마가복음 11:1-11, 누가복음 14:27-44, 요한복음 12:12-19)

Hosanna! (Save us!)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주님께 군중이 외쳤던 환호성이었다.


이제는 좀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외침.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망할놈의 세상을 제대로 만들어주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기대.


에이 못해먹겠다는 식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는 외침.


그런데, 


얼마 후에 드러났지만, 그 군중의 외침은 legitimate 한 것은 아니었다.


They didn’t know what they were shouting for.


정말 며칠이 되지 않아 그 군중은 모두 예수를 떠나고…


그러나 그렇게 absurd한 상황 속에서 나귀를 타고 승리의 입성을 하시며 승리를 선언하고 계신 주님.


그리고 그 승리의 입성은, 십자가의 처형으로 연결되지만, 결국 궁극적인 승리로 이어지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외침을 통해 예수께서는 겉보기에 패배로 보이는 다음 event 넘어 있는 승리를 선언하고 계신… 정말 정말… 부조리한(absurd) 상황인 것이다.


마치 희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암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기 까지 한.


Palm Sunday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사람의 입을 통해 승리의 선언을 하고 계시지만,


deliverance(구원)는 사람의 부조리한 외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쪽에서 준비되고 진행되는 하나님의 agenda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로마가, 산헤드린이, 군중이, 유대종교권력자들이 주도하는 agenda에 의해서 일주일이 자나가며 결국 예수께서는 처형을 당하시지만,


십자가와 빈 부덤의 event를 지내고 나서 보면…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구원계획이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람들이 외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외침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하고 계신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