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아닌 성취를 추구

민우가 학교에서 상장을 잔뜩 받아왔다. ^^

민우의 학교에서는 과목별로 잘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민우는, 전체 과목중에서 절반정도의 과목에서 상장을 받아왔다.

그런데,
민우 말에 따르면 민우보다 상장을 많이 받은 아이가 1명 더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민우는 ‘반에서 2등’을 한 것이다.
(그래봤자, 스무명 남짓한 반에서 2등한 것이므로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자랑으로 삼을 것도 아니다. ^^)

민우에게 많이 수고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고나서,
혹시 민우보다 더 잘한 친구에 대해서 샘이 나지는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민우는,
아니…왜 그런게 샘이나느냐는 표정으로 오히려 나를 쳐다본다. -.-;

민우가 아주 어릴때부터 나의 소망은,
민우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내 소망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보였다!

그.런.데…
내가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니, 경쟁심이 없이 과연 세상에서 survive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1등”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한번 이야기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우는, 내 ‘거룩한 소망’대로 잘 커가고 있는데…
나는 그만큼 잘 커가고 있지 못한 듯 하다. -.-;
 

공부합시다

내가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MIT에서 제공하는 open courseware (web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MIT의 강의: MIT에서는 학부와 대학원생 강의중 많은 부분을 web에 올려서 무료로 들을수도 있고, 각종 숙제와 강의 노트들을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게 해 놓고 있다)를 들으며 예전에 들었던 것을 복습하기도 하고, 내가 이해가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공부한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생각을 해서, 내가 스스로 너무 과소평가를 했던 탓이었을까.
뭔가 쉬운걸 해보자고 학부생 전자과 기초과목을 듣기 시작했는데…
좀 너무 쉬웠다. ^^

그렇지만,
강의를 워낙 잘 짜서 하는 것에 집중이 되어, 어제 저녁에 이 강의를 자그마치 다섯개나 연속으로 들었다. -.-;

그중 다음의 강의 맨 마지막에는,
교수님이 직접 ‘쇼’를 하면서 이제 10대 후반인 학부 1-2학년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 재미있게 관람(?) 했다.

그나저나,
계속 좀 더 많이 공부를 하긴 해야겠다.
성경공부도 그렇고, 인문/사회/역사/철학 등도 그렇고, 경영쪽도 그렇고, 물론 공학/과학쪽은 말할 것도 없고.

바쁘게 살다가 문득 그리운 친구들

바쁘게 지내다가, 
매우 stressful한 환경 속에 있다가,
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함께 떠오르면서 그 사람들과 다시 그런 시간을 갖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데…

네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그때 그 즐거움을 다시 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세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나를 깊게 만들었던 그 대화의 시간으로 다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진다.

두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고생을 했던 /고통을 나누었던사람들이다.
함께  고통스러워했던 그 시간에 서로 힘이 되어주었던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성숙해갔던 순간들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러나…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깊이 기도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함께 하는 기도는, 즐거움과 소망과 깊은 대화와 고통을 나누는 것을 모두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우리를 ‘영광’에 집중하게 한다. 

함께 기도했던,
그러나 지금 내 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문득 그립다. 

어제 들은 말 가운데에서…

어제 실험하면서 들은 어떤 설교 중에서 내가 깊이 마음으로 공감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부부가 되어 살면서, 자신의 뜻을 꺾어 배우자에게 순종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설교에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뜻과 자존심과 생각을 꺾지 않으면, 좀 더 확대된 공동체 생활에서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내용도 따라왔다. 

어떤 부부는 좀 더 많이 다투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부부 생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였다.

TV 광고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지극히 피상적인 행복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 부터 벗어나,
부부 관계라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촉구의 내용이었다.
(이런 표현을 그 설교자께서 바로 쓰시지는 않았지만… 내 말로 좀 더 paraphrase 하자면… ^^)

나처럼…늘…
내 뜻을 꺾어 아내에게 순종하기 더딘 사람에게…
참으로 아픈 설교였다. 

복음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은데…

“복음”은 천사들도 보고 또 보아도 감탄하는 신비라고 했다. (벧전 1:12)
여기서 천사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표현은, 영어로 lust(음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라고 했다.
그만큼 중독성있으면서도 신비한,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전엔… 매우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형태이긴 했으나,
교회에 가면 늘 그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비록 그 복음의 내용이 매우 제한적이고, 다소 치우친 부분도 없지 않았고, 또한 대단히 환원주의적(reductionistic)한 것이긴 했으나,
정말 어떤 때는… 맨날 교회오면 저 얘기야… 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같다는 기억이 있다.
(그리고 놀라운건, 그 똑같은 얘기에 매주, 매일, 맨 앞에 앉아서 감탄을 하며 경청했던 할머니들이 계셨고.)

그런데,
요즘은 정말 그 복음의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기 어렵다.
복음에 헌신해라, 복음이 최고다, 하나님께서 잘 돌보아 주신다, 복음에는 이런 유익이 있다, 복음은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이다, 복음을 적용하면 이렇게된다.. 등등의 이야기는 하는데…
막상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 “복음설교”를 쌈빡하게(!!) 들어 본적이 언제였던가.
정말  복음설교를 제대로 하는 설교자를 꼽아보라면… 누구를 생각해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그 영광스러운 복음… 내가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은 그 복음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아…
내가 말씀을 열어… 자꾸 읽고 읽고 또 읽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복음의 이야기만…
한동안 내내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다 아는 얘기, 이미 다 들어서 통달한 이야기인것 같지만…
또 다시 들으면 또 다시 신비한… 그 복음. 

위해서 기도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때…

얼마전
유명한 테러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을때,
미국에서는 큰 환호성이 거리를 뒤덮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때 비행기 안에 있어서, 그 내용을 뉴스로 바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justice(정의)가 구현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있었던 불편한 마음들…

Tony Campolo의 podcast를 듣는데, 거기서 Tony Campolo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위해서 기도해왔다. 매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주 했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그가 잘못된 길로부터 돌이킬 수 있도록,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진리를 알게될수 있도록 기도해왔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한편 안심이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내가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에 나는 기뻐할수만은 없었다.”

이런 일련의 생각들과 관련해서 블로그에 글을 하나 써야겠다고 하던 중에,
뉴스앤조이에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많이 담은 기사가 나왔다.

특별히,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과 관련해서는 최근 내가 많이 깊이 묵상하고 있던 바였는데…

That’ll be nice!

내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열심히 광고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어제는 민우가 내게 이것과 관련해 질문을 해서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민우 : 왜 사람들이 이번 토요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그래?

아빠 : 글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때 오신다고 믿고 있다나봐.

민우 : 그 사람들은 무슨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나보지?

아빠 : 음…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크리스찬이라고 얘기하긴 해.

민우 : 이상하다. 

아빠 : 민우는, 그 사람들이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

민우 : 예수님은 예상하지 못하게 (unexpectedly) 오신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다고 그러잖아.

아빠 : (흐뭇해 하며) 그래, 민우가 맞다!
그런데, 민우야, 만일 그 사람들이 정말 맞으면 어떻게 하지? 이번 토요일에 예수님이 진짜 오시면?

민우 : (아주 밝게 웃으며) That’ll be nice! 그럼 예수님 만날 수 있잖아!

—-

나는 이 시점에서,  민우에게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이, 내 믿음보다 더 깨끗함을 보았다.
나는 그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이 어쩌고… 종말론이 어쩌고… 그런 얘기를 이끌어 내면서 민우에게 뭔가 신앙교육을 시키고 싶어 대화를 이끌어 냈는데,
민우는 “예수님 보고싶다” 라는 한마디로 내 모든 복잡한 논리와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20년전 읽었던 책들을 보며

이번에 한국 출장중에,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한쪽 방에 잔뜩 쌓여있는 책들을 뒤지던중,
내가 막 복음에 눈을 뜨던 시절, 
정말 그야말로 미친듯이 책을 사서 읽던 시절에 보았던 책들이 아직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와서 그 책들을 보면,
밸런스가 깨진 것도 있었고,
유치한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읽지 않는 것이 좋을만한 책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책들을 읽으며,
그리고 성경 말씀 연구를 나름대로 어설프게 해가며,
얼마나 흥분하고 기뻤었던가…

20년전의 내 모습이 그 책들에 담겨 있었다.

이젠 책을 읽으며,
그 책이 어떤 사상의 흐름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보게 되고,
그 책을 비판하는 일부터 먼저 하게 되지만,

20년전에는,
그야말로 ‘아무 책이나’ 읽으면서도…
내 영혼과 생각을 살찌웠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책들로부터 out-grow 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는 하지만,
20년전 내 영혼을 살찌웠던 그 경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