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은 사람의 어리석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많아,
늘 바쁘다.
그리고 자주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나라도 때워야 하겠다며 달려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요즘 깊이하고 있다.

자주 나는 그것을 passion이라고 착각해왔으나,
그저 어리석게 오지랖 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control-freak으로, 내가 control을 잡고 있으려는 악한 생각에 근저에 깔려있을 수도 있다.

다른 이의 짐을 져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다른 이의 일을 해주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은… 악한 일이 아닐까 싶다. 

민우가 자기 친구들에게 보낸 글

The Girl you just called fat? 
She has been starving herself & has lost over 30lbs. 
The Boy you just called stupid? 
He has a learning disability & studies over 4hrs a night. 
The Girl you just called ugly? 
She spends hours putting makeup on hoping people will like her. 
The Boy you just tripped? 
He is abused enough at home. 
There’s a lot more to people than you think. 
Put this as your status if you’re against bullying
어디에서 이런걸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우가 자기 친구들에게 이걸 나누면서 친구들 왕따시키고 괴롭히는거 하지않는 ‘캠페인’ 같은걸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기특한놈. ^^ 

KOSTA/USA-2011 등록 시작!

2011 KOSTA USA 홍보영상 from KOSTA USA on Vimeo.

KOSTA/USA-2011 conference의 등록이 시작되었습니다.
http://www.kostausa.org 로 가시면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 간 KOSTA/USA 에서는 우리의 삶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어 왔다. 2008 년에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야 함을, 2009 년에는 세상 가운데서 용기를 갖고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있음을, 2010 년에는 하나님 나라가 모든 민족과 우리삶의 전영역에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그렇다면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이 질문의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집착한 바리새인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와 타협한 사두개인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고, 무력을 통한 권력 쟁취를 마다하지 않은 열심당원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공동체 안에서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냄으로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였고, 또한 이미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단면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고 드러냈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관찰하고 배울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은 예수의 인격이 우리의 내면의 변화의 궁극적목표에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예수를 닮아가는 데에 그지향점을 두어야 한다. 먼저 마음의 결단을 통한 변화가 필요하다. 세상이 원하는 방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결단 없이는 우리의 변화가 시작될 수 없다. 예수를 닮는 것은 이 결단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되는 과정으로서, 끊임없는 훈련과 자기부인을 필요로 한다. 예수의 인격이내면화 되고 예수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가치가 우리의 내면의 가치로 서서히 뿌리박기 위한 과정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가 사셨던 삶을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를 닮고 그가 사셨던 삶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개인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우리의 궁극적인목표일 수 없다. 예수의 명령과 사도들의 권면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고, 바로 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기독교를 당시의 문화 및 타종교와 구분 짓는 것이었다. 우리의 영적인 훈련과 성숙은공동체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 결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제자들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통해 예수를 닮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를 통해 세상 가운데 전달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가치를 내면화 하고, 내면화된 가치를 공동체 가운데 살아낼 때 드러나는 구체적인가치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가치는 예수께서 계셨던 그레코로만 문화에서는 강조되지 않았지만, 성경은 사랑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치셨고, 사도들 역시도 여러 은사 위에 사랑이라는 가치를 두었다. 이는 사랑없이는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여타의 가치가사라질 것과 달리 사랑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백성으로서, 우리는 사랑이셨던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하고, 또한 우리의 공동체는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우리 각자가 예수의 삶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삶을 조금 더 실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2011 KOSTA/USA 를 통해, 마음의 변화 없이 실천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를 넘어서, 우리의 내면을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우리는 동시에 이 세상 문화에서 강조되는 무법주의의 오류를 넘어서, 그분을 더 깊이 닮아가기 위해 예수가 사셨던 삶의 본질을 깨닫고 그 삶을 살아나가기로 결단하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가 성숙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공동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함을 깨닫기 원한다. 

내 탓이오

내가 관심을 가지고 follow 하는 사람들의 한계(?)일까.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 발언에 대해 분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twit 들을 만난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중 대다수는, 이런 입장을 취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조용기 목사님의 언급을 비판한다. (물론 나도 그렇고. ^^)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는 정말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기 목사님을 까대는 의도에는,
1. 나는 그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2. 기독교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대표되지 않는 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3. 평소 조용기 목사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에 이 기회를 빌어 마구 욕하고 싶어하는 마음

등등이 섞여 있지 않나 싶다.
내게도  역시 그 세가지가 모두 함께 있고.

그러나,
어쩌면 정말 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하는 자세는,
나도 조용기 목사님과 다르지 않다.
나도 조용기 목사님이 믿는 다고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을 믿고 있다.
나도  같은 기독교인이다.
라는 시작점에서 시작해서,
엎드려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나,
그런 기독교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다른 기독교인의 모습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조용기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 처럼,
일본인들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 분노가 표출되는 것을 보며… 섬찟한 느낌을 또한 갖게된다.

Would I….?

Fuller Seminary에서,
Stanley Hauerwas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강연의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다.
미주뉴스앤조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 찾은 것이었다.
(그의 책, Hannah’s child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몹시 피곤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그 강연의 상당 부분을 앉아서 들었다.

매우 심한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내와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title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잉태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보배가 삶에는 분명 있는 듯 하다.
만일, Hauerwas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의 파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고통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그는 그 고통의 길을 택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고통의 길을 통해서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런 고통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일하시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저 놀랍기만하다.

When Christianity is assumed to be an “answer” that makes the world intelligible, it reflects an accommodated church committed to assuring Christians that the way things are is the way things have to be. Such answers cannot help but turn Christianity into an explanation. For me, learning to be a Christian has meant learning to live without answers. Indeed, to learn to live in this way is what makes being a Christian so wonderful. Faith is but a name for learning how to go on without knowing the answers. That is to put the matter too simply, but at least such a claim might suggest why I find that being a Christian, makes life so damned interesting.
– Stanley Hauerwas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할 때에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 되는데,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에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15% 쯤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약 85% 쯤 하고 있다.

KOSTA 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5% 쯤 하는 것 같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95% 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듯.

하고 싶은 일보다 몇배나 많은 해야하는 일들을 해나가며,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일이…
하고 싶은 일에 탐닉하며 얻는 shallow한 것보다 훨씬 더 joyful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순절을 준비하면서

Scripture Union에서 사순절(Lent)를 맞이해서, daily devotional을 발행한다.

Journey to the Cross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rss feed로 받을 수도 있고, 이메일로 받을 수도 있다.
사순절동안 좋은 묵상의 자료가 될 것 같은데,
십자가로 가는 journey를 나도 깊이 해보고 싶다.

유사 기독교 단체의 횡보

어떻게 된 것인지,
최근에는 대통령을 위한 기도 연대 라는 정체불명의 유사기독교 (pseudo-Christian) 단체가 내게 계속 이메일을 보내오고 있다.

내용을 보면,
극우의 정치 단체이지 결코 기독교적인 정신을 찾아 보기 어려웠다.

내용들을 보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대통령이 있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
“오만 방자한 이회창은 정계를 사퇴하라”
“스쿠크법은 한국을 점령하려는 이슬람의 음모이다”
등등의 이야기이다.

내용이 대부분 너무나도 쓰레기 같은 수준이어서,
읽어 내려갈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약간 시간을 내어서 읽어보니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의 말들이 많았다.
그들의 주장중에 많은 것에.. wikipedia에서 쓰는 것 처럼 [citation needed] 라고 꼬리표를 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겼었다.

그래서,
그 이메일을 보내고 있는 곳에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1천 2백만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오만 방자한 이회창씨를 심판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이름에서 빼달라.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을 기뻐하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의 주장이 복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의 영광은, 권력을 가지고, 이익집단/압력단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섬기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께서 만일 이 시대에 살고 계시다면, 너희들 힘을 합쳐서 이익집단으로 행동해라 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들과 같은 유사기독교(pseudo-Christianity) 단체들과 내가 동일시되고 싶지 않다.
제발 내 이메일 주소로 이런 이메일을 더 이상 보내지 말아달라.

물론,
수차례 그렇게 이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spam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여전히 그분들은 내 이메일 주소로 계속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에 덧붙이는 JP님에게 드리는 답글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글에 대해서 JP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을 이곳에 그냥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리해서 써봅니다.
kosta facebook page에서도 Jekyung Lee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JP 님과 비슷한 입장인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

JP 님,
깊이가 없는 글들을 그렇게 자주 읽어주신다니 참 많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과 생각을 올려주셔서 저로선 참 감사하고요.
가까이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만…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배우는 것은 저로선 참 즐거운 일입니다. ^^

자칫 제가 쓴 글이,
다시 읽어보니,
그리고 쓰신 덧글을 보니,
총체적(holistic) 복음의 입장이 아닌, 영혼구원이외에 다른 것들을 폄하하는 것 처럼 비추어질 수 있었겠다 싶군요.

독자들이,
이미 저와 여러가지 형태로 교분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가정해서 이 블로그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앞으론 좀 더 글쓰기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JP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이땅에서의 소망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초월적, 내세적 구원만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포기하며 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다만,
제가 이 글에서 쓴 context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은 지금 아래 쓴 것과 같은 상황을 머리속에 상상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다가 원래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가령,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해서 노숙자가 된 어떤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는 아내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해 버렸고, 중학생이었던 아들 하나는 친척집에 부탁했는데, 얼마전 그나마도 가출을 해서 행망이 묘연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정신적, 육체적…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총체적 복음”이라는 성경공부를 막 마치고 온, 연봉 20만불의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compassion’을 가지고 다가가서, 예수의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라면서 힘을 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고, 예수는 당신과 같이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나그네된 삶을 살면서 영원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고, 우리의 영혼이 이미 구원얻은 것에 함께 감사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아주 generous하게 1천불짜리 수표를 한장 써주고 갔습니다. 기도하겠다는 말도 함께 하면서요.

그냥 순전히 ‘요소(element)’로만 보면요, 이 젊은 변호사는 총체적 복음이 이야기하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것도 다루었고요, 전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담론도 다루었고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금전적인 도움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요,
막상 그 노숙자는,
너무나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서, 그 젊은 변호사가 한 이야기가 전혀 머리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1천불이라는 큰 액수의 check도 어떻게 써야하는 지도 모르는채, 흐지부지 며칠만에 탕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약자’인 그 노숙자에게, ‘강자’인 그 젊은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총체적 복음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멋진 사역을 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이 했던 일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요건’들을 적어놓은 check list에 check-off 한 것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변호사는, 그렇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노숙자의 상황에 대해 피상적 접근밖에 할 수 없었고, 정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무엇이라도 할 힘과 용기를 찾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전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막 그 삶을 벗어나 동네 목공소 견습생으로 일하는 어떤 청년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견습생은, 노숙자에게 다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노숙자의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함께 울었습니다.
한 30분을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지만, 그 견습생은 자신이 그 노숙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 더 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함께 울고는, 눈물로 그 노숙자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안된다고… 바로 2달전까지 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는데…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소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노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힘내는데 나도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에게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훈련센터가 있는데, 거기 왕복할 수 있는 버스값을 자기가 돈을 아껴서 조금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는 그렇게 힘을 내고 기운을 차려서, 그 견습생의 도움을 얻어 직업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늦은 시간이면 그 견습생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기도를 하기도 했고요.
조금씩 자신이 힘과 자신감을 되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요,
결국 그 노숙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총체적복음의 요소들’ 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견습생을 통해서 공급된 하나님의 은혜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은혜의 중요한 요소는,
Extra Nos (outside of us) 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없는 것이 밖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도의 도움이나, 실제적인 경제적 도움이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변호사도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인간적인)’ 제도의 도움이나 경제적 도움이 궁극적 해결이라기 보다는,
결국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Extra Nos)가 궁극적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약자를 돕고 섬겨야 하지만,
그들이 결국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흘러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로부터 혹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혹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유사 복음 (pseudo Gospel)에 몰입된채 자기만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위에서 언급한 젊은 변호사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도 아니고, 20만불을 벌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

제 고민과 생각이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 허술한 생각과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comment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JP님께 쓰는 답글의 형식으로,
저도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글을 써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빈구멍이 많을 줄 압니다. 계속 좋은 comment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