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성찰이라는 것이 기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인 것은 사실이다.
자신을 잘 알아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건강하게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내가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수긍하는 편이다.
나도 역시 자기성찰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건강한 순기능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본질은 자기성찰이 아니라 계시라고 생각한다.
Extra Nos, 즉 우리 밖으로부터 은혜와 계시가 우리에게 invade(침략)해오는 것이 적절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을 할 능력이 없는 피조세계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성찰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채, 명백한 계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볼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내면의 목소리, 내면의 모습을 찾는 노력보다,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에 주목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면의 목소리를 찾는 노력 조차도, 전적타자이신 절대자의 선포와 계시와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활용되도록 제한하는 것이 건강하지 않을까…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글들은 많이 봤어도 자기성찰을 까는(?) 글은 진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독서량이 놀라울 정도로 작기는 합니다.)
처음보는 제게는 아주 날카로운 통찰로 다가옵니다.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시에 주목하는 노력은 어떤것일까요?
하하…
제가 별나게 튀는 짓을 본의아니게 해버렸습니다. ^^
흠… 가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요..
법대에 다니는 A 라는 대학생 하나가, 바로크 음악에 심취해있다고 합시다.
A는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 들을 수록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크 음악을 듣고나면 성경 말씀도 더 쏙쏙 잘 들어오고요. 룸메이트와도 더 잘 지내게 되고…
A는 거의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바로크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치유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로크 음악에 깊이 끌리는 이 감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brokenness가 고쳐진다고 생각합니다.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들도 살펴보기도 하고, 왜 바로크 음악이 나에게 이처럼 큰 impact가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어릴때 나는 무슨 상처가 있기에 이렇게 바로크 음악에 끌리는가? 그 상처는 어떻게 바로크 음악을 통해서 치유되고 있는가?
그런데…
막상 이 친구는 바로크 음악 CD를 사느라 생활비를 다 탕진해버리고 있고,
중간고사도 망쳐가며 ‘자신을 치유하는’ 바로크 음악에 더 빠져들어갑니다.
…
좀 과장을 해서 쓰긴 했습니다만,
내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때 무엇이 들리는지…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낭만주의적 오염이라고 평가하던데요…
사실 A 학생에게 더 중요한… 그리고 A 학생이 따라야하는 계시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해라 라는 말씀에… 감정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순종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경제생활도 규모있게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론 적절하게 바로크 음악을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크 음악을 즐기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빠져 들어가면서, 내면을 찾아내려고 하긴 하지만…
더 분명하게 들어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던가, 성실함, 감정이 따라 주지 않을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등은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을 하려고 할때,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보면서… 왜 나는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는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혹시 옛날에 무슨 상처가 있을까… 하면서 내면을 바라보는 시도를 조금 덜 하면서…
그저 감정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내 안의 성령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에, 그리고 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계시)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동료에게 최선의 것을 해주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좀 허술하게 설명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술이라니요..
귀에 쏙 들어오는 설명입니다.
설명을 읽고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기성찰, 반성적 사고 등등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세워 놓고 자기를 살피는 것, 즉 인식의 틀로서의 자기를 살핌으로서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한계를 인식하게되고 자신의 평가와 판단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줄여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은 바른 자기성찰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기성찰에서 어떻게 졸개님이 설명하시는 성찰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기성찰이 할 수 있는한 자기를 객관화 시키고, 그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한계가 이웃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자기 성찰이 자기연민으로 자신에로의 천착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면, 충분히 말씀하신 부작용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인지적 판단보다는 감성적 직감이 우선이 된 우리시대에는 (저도 포함입니다.) 정말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introspection)은 쉽게 졸개님의 설명과 같은 결과를 나을 것 같습니다.
쓰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은 저는 자기성찰(intro-spection)에 대해 반성적사고 (reflective thinking)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비슷한 말로 쓰이지 않나요..-.-; )
나의 인식의 틀(cognitive frame)을 살피는 그 반성적 사고의 틀 (meta-cognitive frame)이 계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잘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근데 저는 아직 계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시간나시면 설명한번 부탁드립니다.)
글을 쓰고서 졸개님의 원문을 다시 읽었더니 제가 장황하게 이야기한 내용을 이미 함축적으로 언급해 놓으셨네요..ㅋ
제 스스로의 무식을 폭로하는 글인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제글이 재미도 없고..ㅋㅋ
하지만.. 신뢰할만한 신앙공동체에서는 저의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솔직히 꽤나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무식이 공동체에 주는 즐거움ㅋㅋ, 그리고 주위의 분들이 주는 위로, 그리고 배움의 기회…ㅋ (졸개님은 ‘자신의 무식함을 통해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실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ㅋㅋㅋ 이것은 무식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고 무식한 이들만의 특권이거든요..ㅋㅋㅋ)
졸개님의 블로그는 저의 무지가 드러나도 괜찮을 것같은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정없는 피드백 부탁드립니다.ㅋ)
우연히 들르게 된 사람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만 골몰하는 나르시시즘, 이 두 가지와 자기성찰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수의 졸개님은 이 모든 것을 혼돈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기성찰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이 있고 그것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에서 자기성찰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성찰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내 마음의 가난함, 상처, 죄된 모습, 이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한 뼘도 더 좁혀지지 않는, 어떤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런 것들을 묵상을 통해서 거둬내는 과정이 없이, 그저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내 죄된 본성 때문에, 혹은 누군가의 죄된 본성이 내 마음 속에 남긴 상처 때문에 내 마음속이 이웃을 미워하고 있는데, 그저 하나님의 계시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목수의 졸개님도 쓰셨듯이 “자기성찰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자기성찰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 혹은 그 과정이 건너뛰어질 수 있다는 것엔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기성찰과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에 귀 기울이는 것이 mutually exclusive하다고 전제하시는 것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어쩌면 자기성찰은,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잘 분별하기 위한 prerequisite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너무나 많은 잘못을 하고 또 비난을 받는 것은, 깊은 묵상과 자기성찰이 없이,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오독하고 행한 것에서 많은 부분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성찰을 바로크음악에 탐닉해 가산을 탕진하고 공부를 등한시하는 것에 비유하기에는 너무 어폐가 있는 듯 하네요. 아무리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을 감안해 듣더라도 말이죠.
우연히 들러주셔서 comment를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 ^^
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자기성찰의 폐해랄까 그런 것을 언급하기 위해 치우친 예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전체 idea가 misleading하게 읽혀질수도 있었겠다 싶네요.
말씀하신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잘 다루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도 공감을 합니다. 저도 역시 그랬고요. (저도… 늘 제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참 많이 생각하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
다만,
말씀하시대로,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을 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께 가려는 시도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만 계속 머물러서 이제는 충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도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고요.
그런데요…
제가 쓰신 내용과 제 입장이 조금 다른 부분은요,
정말 묵상을 통해서 상처를 거두어내는 작업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제가 충분히 여러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이어서 conclusive한 결론을 제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요…
현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산타클로스 하나님’ 혹은 ‘순정만화 하나님’이 아닌…
전능자, 창조주, 공의로우시고 절대적이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에대한 neglect가 그런 왜곡을 불러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전적이고 overwhelming한 임재/선포/개입/계시가 사람을 사로잡는 것에대하여 인식도 기대도 상상도 이해도 이야기하지 않는 세대가 되어서…
그 간극을 자기성찰/치유/내면 이라는 것으로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쓰신 내용과 저도 생각을 같이 합니다.
좋은 comment 감사합니다.
제 comment에 대해서 다른 생각들이 더 있으시거나… 더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아주 아주 감사히 또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