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osity

가상의 이야기.

몇년 전이었다.

오영이는 꽤 빠듯한 재정을 아껴가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청바지는 10불-15불짜리 사서 입고, 티셔츠도 20불이 넘지 않는 것만 사서 입었다.

점심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하루에 점심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돈이 $2불이 넘지 않도록 정말 알뜰하게 쌌다. (도저히 회사 식당에서 사먹을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어쩌다 밖에서 뭘 먹으면 좀 양이 많은걸 시켜서 집에 싸와서 한끼를 더 먹기도 했다.

완전 구두쇠로 살았다.

그때,

경제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그리 가깝지 않는 어떤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고민하던 끝에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크지 않은 (그러나 오영이의 경제 수준에서는 꽤 큰) 돈을 그 사람에게 주었다. 그 사람이 부담갖지 않게 하려고 많이 노력하면서 그렇게 주었다.

다행하고 감사하게도 그 사람은 그 돈을 감사하게 잘 받았다.

오영이는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전해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는 오영이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루 2불이 넘지 않는 점심을 먹으며 아껴서 그 사람을 그렇게 도운 것인데,

그리고 정말 직장에서 스트레스 왕짱 받아가며 힘들게 번 돈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 돈으로 값비싼 기호식품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영이는 한달에 한번 어쩌다 스타벅스 드립 커피 사 마시는 것도 벌벌떠는데, 그 사람은 매일 그것보다 더 고급의 커피를…

그냥 그 기호식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영이는 거의 가지 않는 비싼 음식점에 자주 간다거나, 꽤 비싼 전자제품을 사는 등, 자신보다 너 높은 spending을 하는 것이었다.

또 화가 나는 건, 오영이는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보냈는데, 그 사람은 늘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며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음…

도대체 이건…

며칠동안 많이 마음 불편해 하다가, 그 사람과는 연락도 뜸해졌고, 다시 또 그 사람을 돕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을 못본지 오래되었지만, 요즘도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때 불편했던 감정도 생각이 난다.

=== 

최근,

초대교회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역사 속의 공동체를 상상해 보면서…

과연 그런 공동체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가령,

하루 12시간 밭에 나가 일하는 소작농을 하며 어렵게 번 돈을, 여러 사람이 모아 한 동네 사는 다른 교인을 도와주었는데,

그 교인이, 아주 게으르게 산다거나 혹은 아주 그 돈을 낭비하면서 허비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공동체는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교회 지도자들은 그것을 불편해하는 교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은혜의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어떤 면에서 이런 이슈를 다르게 다루어 낼 수 있을까?

요즘,

나도 회사 다니며 일하는게 힘이 들기도 하고,

아… 세상에 이렇게 빡세게 맨날 일해서 돈버는데… 정말 돈 벌고 먹고 사는게 쉽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이 워낙 없다보니, 내 소중한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정말 많이 아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내 마음이 각박해지는 것을 보면 그냥 사는게 많이 벅차고 힘든 모양이다.

7 thoughts on “Generosity”

  1. 아시겠지만,^^ 살후 3장에 보면, 그 유명한 “우리는 꽁밥 먹은 적이 없다. 될수 있으면 너희 한테 빈대치지 않을라고 했다.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의 본.이. 될라고 그랬다. 내가 가르친거 알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가 너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야박할 정도로 빡쎄게 쓰여져 있긴한데….. ㅋㅋ 이것이 자기자신을 돌아볼 때 (Reflection)뿐 아니라, 다른이에 대한 구제를 결정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었을까?, 그리고 이것만이 유일한 기준이었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또, 이게 말씀하신 ‘은혜의 공동체’라는 개념과 어떻게 병립할 수 있을지, 무엇이 세상의 원칙과 달라야 하는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시스템 차원에서 더 크게보면, 복지에 대한 정책과 철학의 문제, 빈곤을 이해하는 문제 등과도 맞닿아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 사회 공동체내에 다른사람(약한사람)을 얼마나, 어떻게 도아야 하나
    – 누가 도움이 필요한 약한사람인가?

    또 게으름과 삶의 태도에 대한 것과도 걸쳐져 있는 것 같구요.
    – 게으름의 문제가 개인적 악함인가 사회경제적 부조리의 결과인가?
    등등…(제 분야가 아니라 영 떠오르는 질문들이 아마추어적이네요..)

    1. ㅎㅎ 제 블로그의 거의 유일한 열혈독자이신 아땅님. ^^

      정확하게 제가 쓰신 그런 질문들이 있는 겁니다~ ^^

      위에서 적은 가상의 이야기에서요,
      사실은 ‘오영이’의 상황에 저를 넣어서 생각해보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저는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들을 통해서 아주 부지런하고 효율적으로 사는 훈련을 치열하게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대단히 뛰어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더 manage를 잘 한다고 할 수 있습죠.

      그런데,
      만일 제가 financially support하는 어떤 사람이,
      제 기준으로 보아 그저 ‘게으른’ 사람이라면,
      정말 그런 사람을 제가 financially support 하는게 마음으로 불편하겠지요.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의 문제는…
      어쩌면 제가 support 하는 사람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제가 다른이들보다 덜 게을러서(?) 일수가 있는 거죠.

      어차피 게으름이라는 것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게 아니니까, 상대적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게으른’ 사람에대한 불편한 마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이게 그저 저같이 성격나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일수도 있는거죠.

      가령, 공동체가 함께 support하는 선교사가,
      그 공동체의 기준으로보면 ‘게으른’ 사람이라면?

      음….
      은혜의 공동체가 다루어내어야 하는 issue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좋은 생각들 있으시면 풀어주시죠~ ㅎㅎ

  2. ㅋㅋ 열혈 독자 인정!
    ‘거의 유일한’은 no 인정!ㅋㅋ
    (졸개님 블로그에다가 거의 제 것인양 편안하게 와서 놉니다. 딴소리좀, 그리고 질문좀 할라고 다시왔습니다.)ㅋㅋ

    시카고 코스타 주강사님들 마르바 던 교수님과 김병년 목사님 말씀 기대합니다. (참석은 못하지만 음성파일로라도 들을 수 있기에^^)
    근데 두분 글들을 읽으며 들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에게 책임이 돌려지는 ‘약함의 문제’였습니다
    마르바던이나 김병년 같으신 분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 개인에게 귀책되지 않는 사유로 약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적 육신의 질병, 그리고 가족의 아픔으로 찾아오고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아픔의 일들이었죠. 이런 것들은 제럴드 싯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우워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분들도 비슷한 상황을 걸어갔고 그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나눠주셨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가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개인으로 책임을 돌리는 문제들에 대해서, 그것에 귀인한 약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말씀하신 게으름과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사유는 니가 책임져야 하는 consequence예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요?
    ————
    제가 가지는 첫번째 포인트는, 흔히 우리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개인의 consequence로서의) 약함이 진짜 개인의 책임으로만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머리 나쁜 사람에게 “넌 머리가 나쁘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한다, 머리 나쁘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 넌 머리가 좋으니까 잘먹고 잘사는 것이 당연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고 나쁜것이 바꿀수 없는 선천적 요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바꿀수 없는 생래적 요소에 대해서는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물을 수 없다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합의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어떤가 생각해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넌 게으르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게으르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음…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동의합니다. 그걸 부드럽게 말하면 ‘각자가 뿌린 씨앗의 consequence니까…’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게으름 혹은 삶의 태도는 은연중에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고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언제든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에 그러한 이야기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짜 그럴까? 이런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도 개인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산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가운데 처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삶의 목표나 동기도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 있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굳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개인에게 “니가 책임져야해, 넌 게으르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가 그런 게으름 때문에 약함 가운데있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약함의 신학”에서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거든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막 머리속을 돌아다닙니다.

    (물론 저도 모.든. 못남과 어그러짐을 사회나 시스템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모든면에서 뛰어나고 탁월한 분들이 격는 ‘약함’을 들으며, 혹시 이 약함의 고백이 사실은 (저자들이나 강사님들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또다른 강함을 추구하는(보여주는) 메세지로 들리지 않을까 (e.g. 이런 분들 스토리는 TV에 나와도 정말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줄 것 같거든요. ##(개인이 가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와 노력과 인격으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아무개… 그분 참 훌륭하다.)
    또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과는 어디서 접점을 찾을까 고민하다가 대답도 없는 곳에서 해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탁월하지 못하고 제가 격는 많은 약함들이 저에게 귀인하거든요…-.-; )

    1. 이런 댓글은 제가 이 블로그 ‘메인글’로 올려도 될까요? ^^
      그리고 그로부터 계속 discussion을 이어가면 좋겠는데요.

      아주 생각할 수 있는 논점들을 많이 던져주셨는데요~~~!

  3. 저야 영광입니다요~
    찬바람 쌩 나는 가열찬 비판과 함께 많은 생각 기대합니다.^^

  4. 두분의 대화에서 많은 생각들을 얻어갑니다. 올해 시카고 집회를 준비하면서 아땅님이 마지막에 말씀해주신 부분을 많이 염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약함의 극복보다 약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더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되면 좋겠는데, 그 머물러 있는 것이 순응적으로 또는 수동적인 stay(어쩔수 없으니 즐기자는 식의)로 담기지 않았으면 하고, 극복의 차원과 구별된 약한 사람이 다른 약한사람과 동행하게 하는 실천적 도전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꿈이 크지요..^^;; 프로그램에 이모든 것이 담길 수 있을지, 나름 잘 담아내더라도 참석하고 돌아가시는 많은 분들이 무엇을 가지고 가시는지 정확히 알길이 없어 객관적인 평가도 그저 바램으로 남겨두어야 하나..생각합니다. ㅠㅠ 쓰다보니 코스타의 한계와 약함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몰려오네요. 아무튼 좋은 디스커션 계속 이어주세요 열혈 눈팅독자로서 감사합니다.

    1. ㅎㅎ
      잘 읽어주시니감사합니다. ^^

      집회 준비를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군요.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함박 부어주셔서 (때로는 부담스러울만큼 많이),
      overwhelmed 되어 섬기는 일을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이번에 집회를 섬기는 많은 분들에게 그런 은혜가 풍성하면… 정말 그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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