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16 thoughts on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1. 일단 질문1: 사는 모습의 분류–> ### 하나님

    웬지 사는 모습 (세계관)의 주어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주어를 하나님으로 해서 카테고리를 정리하셨네요.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또 어떻게 보면 한번 더 소화과정이 필요한 분류 이름같아서요.
    이렇게 이름을 지은이유는,
    변/견/불 하시는 하나님의 어느 측면을 경험하며 사는 그리스도인 이런 의미인가요?
    변/견/불 하시는 하나님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은 변/견/불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사는 것인가요?

    웬지 막 졸개님께로부터 뭔가를 더 듣고 싶어 말도안되는 질문이라도 던져야 할 것 같아, 일단 어줍잖은 질문하나 날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모습이라 해놓고 ***하나님으로 카테고리를 정리해 놓으신 것, 제게는 상당히 장로교적으로 들립니다..ㅋㅋ)

    • 더 가까이 형님, 격려 감사합니다. ^^

      아땅님,
      이걸 사실 하나님을 주제로 잡은 건요,

      사실 이 내용 전체가 강의 내용을 정리학것이거든요.
      강의 세팅에서 조금 더 narrative하게 이 강의를 하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가까이 형님이 적으신걸 보니,
      그렇게 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막 드네요. ㅎㅎ

  2. 교수님 강의 끝날 때까지 질문 hold하는게 나은 주제라고 생각해서 아무말 하지 않았슴다. 마지막 정리에 공감합니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 한가지 prescription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되듯, 각자의 삶 속에 임하시는 다양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르고, 그것에 순종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카테고리를 “하나님”으로 분류한 것도 그런 면에서 아주 적절하다고 봅니다.

  3. 일단 질문 2:
    한사람의 삶속에 세가지가 다 존재 할 수 있다… 의 의미가
    20대에는 변-
    30대에는 견-
    40대에는 불- 이런 식으로 시간적차이를 두고 특정 시점에는 하나만 존재하지만 한사람의 일생에는 다 존재 할 수 있다 그런의미인가요?

    아니면
    20대- 변, 견, (변견은 아무래도 어감이…-.-; )
    30대- 변, 불,
    40대- 변, 견,불, 등과 같이 동시, 한시점에 한 개인에게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요?
    같이 존재할 수 있다면… 한 개인에게 두가지의 삶의 방식(세계관)을 취한다…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도 들구요….

    견딤을 통한 변혁
    불러내심을 통한 변혁

    변혁을 통한 견딤
    불러내심을 통한 견딤

    변혁을 통한 불러내심
    견딤을 통한 불러내심

    변혁과 견딤을 통한 불러내심
    견딤과 불러내심을 통한 변혁
    변혁과 불러내심을 통한 견딤…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그냥 생각해 봅니다.
    ㅋㅋㅋㅋ 내가 생각해도 저는 쓸데없는 짓 대마왕입니다요..ㅋㅋ

    • 저는,
      두가지 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변혁적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견디는 삶을 사는 것과 같이 serial coexistence도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형테의 접근을 다 사용하는
      parallel coexistence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4. 일단 질문3: 그냥 막연히…
    바울은 어떤 ‘사는 모습’의 사람이었을까?
    그는 변견불 모두에 해당하는 것 같기도 한데…
    베드로는? 그도 변견불…?
    예수님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요.

    음… 변견불의 요소을 균형잡고 있는 것이 가장 ideal한 모습이어야 하나?
    아이디얼한 ‘사는 모습’은 있나?
    어느 것이 다른 어느것 보다 ideal 하다기 보다는 좀더 ‘상황적절한 사는 모습’만 있는 건가? 등등의 질문도 있고…

    • ㅎㅎ
      저는 사실 뭐 어떤 ideal한 균형이라는건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상황이 변하게되면, 제가 여기 제시한 유형 말고 다른 유형이 더 relevancy를 확보하게 될수도 있다고 보고요.

      결국은,
      처해있는 상황에 얼마나 relevant하게 복음을 살아내느냐 하는 거셍 관한 이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기독교윤리라는게 어차피 상황에 근거한 것이니…

  5. 일단 질문 4: “It works if” 개인의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셨는데, 혹시 시대적 상황에서 요구되어지는 보다 적절한 ‘사는 자세’를 찾는 다면 어떤것이 될까 하는 것도 궁금합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변/견/불과 관련해서 어느 ‘사는자세’가 더 relevant 할까?
    현재 한인디아스포라에게는 변/견/불 중에서 보다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

    갑자기 올 K집회가 생각이 나면서 약함의 신학과 어울리는 것은 ‘견’의 자세인가? 하는 생각도 얼핏 스치고 지나갑니다…

    아시겠죠? 제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지… 최소한 15회까지는 써 주십사하는 무언의 압력을 힘껏 가하고 있는 겁니다.^^

    • 저는…
      사실 여러 세팅에서,
      ‘일반적인’ 학생 대중을 대상으로는,
      견디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편입니다. ^^

      제가 글에서도 썼지만,
      사실 성경에 가장 폭넓게 제시되는 대중적 모델이라고 생각하기도하고요,
      신자유주의체제 내에서 대다수의 청년들이 일단 견디는 것에 대한 이해를 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6. 위의 표에서 ‘변혁의 주체’는 제가 아직 정확히 이해를 못하는 것같습니다.(이전 글은 다 읽었습니다만 요새 한글 이해력이 영 시원찮아서…..^^)

    음,
    변- 피조세계를 통해 (그 개인이 변화시킨다라는 의미 이신가요?)
    견- 하나님의 개입 (딴 것도 다 긍국적으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인데, 여기서는 그 상황에 있는 당사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신가요?)
    불-이건 공동체가 변혁의 주체라는 말슴이시죠? (여기서 변혁의 대상은 이 공동체를 보고 있는 세상이죠?)

  7.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쓸데없는 소리 하겠습니다…. (잘문이 없다는 말씀에 불끈해서…ㅋㅋㅋ ‘ 버럭, 이제까지 질문 꾸욱 참아왔는데’…하면서요..ㅋㅋ)

    세가지의 ‘사는 모습’은 공히 나(그리스도인)과 세상, 변혁의 주체와 변혁의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약간 계몽주의적이고 모던이즘적인 ㅋㅋㅋㅋ 느낌..?
    만약에 이런 변혁의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면 어떤 모습의 ‘사는 모습’의 틀이 나올까? 이구분을 포스트모던이즘적으로..ㅋㅋㅋ 뛰어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주체성과 대상성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선인가?
    ㅋㅋㅋ 뜻도 잘 모르는 어려운 말들 작렬…ㅋㅋㅋ 이제 진짜 그만 써야 할때가 된 것같습니당…..

    감사합니다, 그리고 계속 좀더 이 틀에 대해 생각을 나눠 주세요.

    • 네… 동의합니다.
      뭐 제가 어차피 포스터모던하지 않으니까요… ㅋㅋ
      다만 여러 형태가 공존하는 것이라는 room을 열어둔 것이 포스트모던한 것을 포용하려는 시도라고나 할까요. ㅎㅎ

      애고…
      질문 없었다고 ‘투덜’댄거…
      잘못했습니다요. ㅋㅋ

      이렇게 아땅님께 혼나게 되어버릴 것을 말입니다요… ㅎㅎ

  8. 부끄럽지만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 때는 음,

    확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마음/
    하나님 혹시 안계신 것 아닌가 하는 의심/
    내가 사는 이 모습이 도데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과 삶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 질문/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인가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잃어버림/
    하나님은 더이상 하늘을 가르고 세상속으로는 들어오시지 않나 하는 이신론적 도전/
    무언가라도 해서 내가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를 증명해 내고 싶은 욕구/
    현재 가시적 winning side, 성공하는 쪽에 있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

    등이 정말 힘든 부분들이었습니다. …. 여전히 힘든 부분들이구요… -.-;
    그냥 하나더 사족처럼 덧붙였습니다.

    • 네…. 정말 저도 그렇습니다. ^^

      그래서, 견뎌야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초월, 신비와 같은 것들이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고…
      그 초월과 신비로 이끄는 중요한 관문이 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적어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전보다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은 많이 떨어지는데,
      신비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한편,
      지나치게 종교화되고 게토화되는 기독교라고 볼수도 있겠으나,
      현실의 고통을 초월로 해결하고자하는 시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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