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견딤”과 “작은 변혁”(할 수 있는 사람들, 꼭 리더가 아니더라도)이 함께 가는 모델을 지지합니다.
세번째 입장은 별로 지지하시지 않으시는 거군요.
내일 조금더 쓰겠지만,
저는 이 세가지가 모두 혼합된 양식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
저는 세번째 입장이 첫 두개와 비교될 수 있는 모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첫 둘과 혹시 다른 입장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큰 틀이라고 봅니다. 그냥 공동체는 세상에 있으나 분리되어 있으나(지양해야 하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