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mish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mish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mish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mish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