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사상에 대하여 제대로 평가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거의 20년 전에,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한권 책 읽은 거랑,
비교적 더 최근(?)에 ‘하나님의 선교’ 책 한권 읽은게 전부다.
그나마 최근에 K 간사들이 열심히 읽으며 스터디 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교’는 서문도 읽지 못했다. -.-;
(그러므로, 혹시 이 글을 읽는 K 간사들을 비롯해서, 크리스 라이트에 대해 좀 잘 아시는 분들이 comment를 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다 ^^)
그런데,
어제 아침, 한국에서 내 동생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관점에 대해 비판적/회의적 질문 하나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창 18:19을 설명하면서 말하는 “선택-윤리-선교”의 설명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의 도’라는 윤리적 기준에 따라 사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고 열방에 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너무 윤리학자적 입장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아낼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될까?
오빠도 알겠지만, 총체적 선교(전도 이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도에 치우친 선교를 벗어나도록 말하는 책이라… 복음 전도의 ultimacy는 인정하지만 priority를 강조하면 relevance를 잃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 자체에 동의는 되지만
윤리적 기초에 따라 공동체가 자라가야만 언약이 성취된다는 해석은 너무 지나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도 사실 이 의견에 많이, 깊이 공감한다. ^^
이분이 기본적으로 구약학자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윤리적 강령과 선교적 하나님을 통합시키면서 그런 framework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나도 역시 매우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동의도 하는데…)
그러나,
자칫
- – 언약과 윤리를 너무 긴밀하게 연결시켜 놓아서 은혜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
- – 실제로 선택-윤리-선교로 이어지지 않았던 반례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는 점 (한국 교회 초기 선교만 해도 그렇지…)
- – 이런 접근이 궁극적으로 균형잡힌 하나님 나라의 시각과 선교적 시각을 세워주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선교/전도 자체에 대한 열정을 식게 만들지는 않겠느냐는 실질적 우려
등등이 사실 내게는 있다.
저도 어제 동생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택-윤리-선교’에 해당하는 글을 읽으며 가졌전 다바답함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수동성’,’은혜’ 그리고 (조심스럽게 ) ‘성령”을 이야기 하며 풀어나가는 동생분의 설명이 원글의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제 가슴을 뜨겁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어떠한 ‘루울’이나 ”공식화’ 또는 ‘도식화’ 하는것에 쉬 마음이 가지 않는것이지요.
예수를 통한 재창조(새창조)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백성에게는 마땅히 지키고 따라서 살아야 하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서는 살아지는(사는것이 아니고 살아지는) 산상수훈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예전식 표현으로, “넘사벽” ㅋㅋ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그림에서 지금의 세상속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속의 ‘산상수훈의 삶”을 미리 땡겨(?) 맛보고 살아가는 삶이 있는 개인과 공동체 주위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비추어질지 모르는 것들이 드러나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빛들이 비추어지는 속에서 ‘선교’라는것으로 전이 되는것이 아닐지…
그래서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바라본 ‘선택-윤리-선교’의 그림이 일면 그럴듯 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방향성과 시각의 그리고 넘사벽의 부분의 차이는 조금있지만)
-사람이나 어떤것에 레이블을 붙여서 이해하는것이 약하고 그런것을 무척 싫어하는 편인데,
크리스퍼 라이트를 “(구약)윤리학자”라고 레이블을 붙인 요약문장을 보고는 ‘책속에 나타난 의문점들이 조금 명료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라이트의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고,
적어도 지금 21세기의 선교를 이야기할 때 매우 relevant한 것이라고 봅니다만…
이게 얼마나 광범위하게 혹은 general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좀 신중한 입장입니다.
선택-윤리-선교의 framework을 이해할때,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교’가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기술이라고 봅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윤리적 삶을 살아야한다” 는 식의 윤리 강령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교를 해 나가시는 방식에 대한 기술이라는 거지요.
말하자면 prescription이 아니라 description으로 본다는 겁니다.
뭐 그러나…
이것도 라이트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껄이는 것이니…
JM님께서 열심히 그 책 잘 읽고 제게 좀 가르쳐 주시지요. ^^
크리스 라이트 이야기라서 한번 기웃거려봅니다. 루터적인 이싱칭의의 프레임에 많이 갇혀 계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하시기 위함’이라는 로마서 8장의 진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구요. 선교 현장에서 정말 선포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복음’은 ‘살아가는 삶’입니다. ‘윤리’라는 말에 너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택하시고 죄악(하나님의 나라를 반역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것)에서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그 이후의 마땅한 삶(영생)을 가르치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 나라’ 프레임이 아닌 ‘개인구원 프레임’에 갇히면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높이뛰기 바를 올려 놓고 그걸 넘으면 좀더 올려서 결국을 못뛰는 것을 고소해하시거나 비난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의 전 과정을 주도하시고 기뻐하시는(물론 자녀를 키워보신 분이라면 이 안에 얼마나 많은 눈물, 좌절, 훈육, 꾸지람 등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실겁니다) 아버지이십니다. 윤리는 그런 점에서 온전한 종말을 향해 가는 좋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주님의 산상수훈을 잘 보시면 십계명의 뼈대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산상수훈..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소위 말하는 전도와 선교의 분리에 대하여 성경은 한번도 그런 이분법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 은 ‘하나님 나라’ 의 ‘삶’, ‘영생’ 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삶과 유리된 것일 수 있겠습니까? 회개의 이유가 다른 것 아닌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기때문이라고 주님이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은 ‘육신’이 됨으로써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사회적(또는 공동체적) 책임’이 배제된 ‘나라’의 개념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선포(전도)’되지 않는 ‘나라’가 무슨 나라이겠습니까? 극심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 구원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의 전환에 있다고 봅니다.
이혁진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comment 감사합니다.
쓰신 내용은 저도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제 생각엔, 제가 쓴 글의 요지를 좀 오해하신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글을 읽고 보니, 저는 이미 잘 알지 못하는 분이 이 글만 읽으면 그렇게 오해할수도 있겠다 싶군요. 뭐 짧은 글이다보니 그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뭐 이분법적인 것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니고,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선택-윤리-선교라는 framework이, 과연 성경의 THE narrative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앞의 제 comment에도 짧게 썼지만,
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접근이,
21세기, 비서구권중심의 선교가 main stream이 되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인 중심의, Christendom-지향적 선교가 아니라,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가능한 선교 전략으로서 저도 지지합니다.
다만,
그런 framework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THE Narrative인지 하는 것에 좀 의문이 많이 있습니다. A Narrative라면 뭐 저는 더 쉽게 받아들이겠는데 말이죠.
얼핏 보니, 이혁진 님은 라이트에 대해 좀 아시는 것 같은데,
이와 관련된 라이트의 입장이 어떤지 좀 아시는지요?
가령,
선택-윤리-선교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되어온 지난 수백년의 선교는 어떻게 설명될 수있는 걸까요?
제 블로그는 아니지만 댓글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는 장이라 감사를 전합니다. (특히 시간을 들여 긴 댓글을 달아 주시면 많은 생각할것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들에게 – 이혁진님을 포함하여..)
‘율법의 요구’에 관한 논의(논쟁)-혁진님께서 이야기 하신 로마서 8장의 진술과 더불어 많이 이야기 되는것이 더불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 3장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등등)는 수 많은 신학자들에게 의해 이미 나누어 졌으며, 나누어 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누어 질것이라 생각하여 어떤것이 맞는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것 같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를 통해 성취(fulfill)되었다는 것은 율법이 이야기 하는 도덕이나 윤리가 더 이상 없어도 된다는 ‘반법주의’적인거나 ‘무 율법주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율법의 요구”가 예수의 “사랑의 법”(제가 산상수훈의 삶이라고 뭉떵거려 적은) -이라는 것안에서 지켜기고 또 율법의 요구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살인하지 말라는 것보다 넘어서는 그러한 이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닌 사랑하는것이 마땅한 (하나님 나라)’사랑의 법’의 요구(?)의 삶이 살아지는것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삶(법?)이 아닌가 하는것이지요.
결코 살인하는것을 금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거나 그러한 ‘윤리’가 옥죄인다고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목수의 졸개’ 님은 어떠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저를 바라볼때 ‘이신칭의’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고 봐지는것이 사실입니다.(여기서 ‘믿음’이란것이 제 ‘믿음’이라기 보다는 제게 전가된 예수님의 ‘믿음’이긴 하지만)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길지 않아 많은것들을 배우고 또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책을 읽어가면서 또 배워가는것들이 있습니다.-‘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교도 아직 초반부를 읽고 있어서 여러가지 기존의 생각들과 상충되고 또는 이해가 잘 안되고 하는 부분들이 많네요 – 그중의 하나가 ‘제한적인 의미의 선교적 시각에서 통전적의미에서의 선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곳에 댓글을 통해서도 많은것을 배우니 ‘혁권님’같은 분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에 대한것이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시면 조금을 더 배울수 있을것 같아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JM은,
제 블로그 방문자 중에서,
꽤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가지신 분이시죠. ^^
그냥 지나가는 소린데도 귀 기울여 들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제가 일부만 보고 말참견을 한 것같아 죄송합니다. ‘목수의 졸개’라는 닉네임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성경을 보는 여러 렌즈, 혹은 주제어가 있지만 (예를들어 사랑, 예수님, 성령, 율법, 약속…)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을 보는 대주제가 ‘하나님 나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즉 님의 말씀을 그대로 차용하면 ‘하나님 나라’는 a framework가 아닌 ‘The framework’라는 것이지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나라의 3대 구성요소인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그리고 ‘땅,기업,영역’일 즉 나라의 영토’의 다이나믹 (크리스 라이트가 그린 삼각형 그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공동체 윤리), 그리고 선교(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온전함(teleios)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구조가 성경의 전체 구조이고 신약 이후의 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지요.’선택-윤리-선교’라고 하는 chain 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큰 이야기를 염두에 둔 설명이지요. 저는 부산에서 부산의료 선교회와 세계로 병원이라는 작은 전문인 의료선교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 선교파트너이면서 의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회심한 이후의 전 삶의 방향이 이러한 큰 그림과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고요, 크리스 라이트의 영향을 받은 All Nations Christian College에서 선교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공동체의 경험을 했었고 지금은 그것을 작은 현장(영역)에서 살아내려고 많이 애쓰고 있습니다. 세계로 병원(롯데야구로 유명한 사직 야구장 맞은편에 있습니다) 을 오실 기회가 되시면 점심이든 저녁이든 한번 쏘겠습니다. 글로 만나뵙게 되어 반갑고요.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제 글쓰기에 좀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
저는 하나님 나라가 The narrative라는 것에는 물론 동의하는데요,
그리고 설명하신 그 삼각형 모형 역시 저도 라이트의 책에서 익히 보아 잘 알고 있고요…
제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야기한 framework의 validity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야기한 선택-윤리-선교라는 framework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유일한 형태는 물론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그냥 현재로서 가지고 있는 관점은,
라이트의 그 그림이, 지금 21세기 선교의 전략으로서 아주 훌륭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래서 저도 eagerly 받아들이는데…
다만 그런 방식이 선교의 유일한 방식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오랬동안 섬겨왔던 코스타에서 금년에 이것을 주제로 잡았으니… 아마 저도 좀 더 배우면서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보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나저나 세계로 병원은 저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고 반갑고 감사합니다.
사실 제 동생(위에서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관점에 딴지를 건)도 한국에서 의사입니다. ^^
제 이메일 주소가
woodykos @ 쥐메일 입니다.
혹시 제게 이메일 한번 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뭐 당장 제가 부산 갈일이야 없겠지만서두… ㅎㅎ
(혹시 저희 산호세쪽에 한번 여행오실 계획이라도? ㅎㅎ)
이메일로 인사라도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변두리 블로그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JM 나누어 주신것을 통해 많은것들을 배우고, 이야기 해주신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바라보며, 그 나라의 더 깊고 높고 넓음을 바라보고 소망하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에서 살고있으며 ‘한국국민’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물을 바라보면서 ‘한국’또는 ‘살고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백성의 눈으로 사물을 재 해석 하려고 노력(?) 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사는데…. 혁진님의 글에서 “롯데””사직” 이라는 글을보고 (본향을 찾은듯)마냥 반갑고,반갑고 또 반가운것을 보니…전 그냥 “부산 싸나이” 인가 봅니다.ㅋㅋㅋ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