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t – 내 묵상 (14)

Chris Wright은 구약학자이다. 복음주의 구약학자 (Evangelical OT scholar)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개념을 복음주의로 가지고 온 것은 대단히 brilliant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러한 개념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서술했던 것과 같이, 구약시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premise가 달라졌다.
구약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던 반면,
신약은,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그것을 성취하신 시대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일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인건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서두…)

사실 사도행전이나, 기타 서신서에 드러난 신약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기 보다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책을 건성으로 보아서 그런진 몰라도,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차드 헤이스의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를 읽겠다고 작정만하고 읽지 못한지 벌써 몇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와 연관시켜서 좀 더 공부를 해보아야겠다.

4 thoughts on “The Sent – 내 묵상 (14)”

  1. 기회가 되실 때, 말씀하신 두가지 차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vs.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는 삶)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 현실 속 신자/백성의 삶에서 이 두가지가 다른 양태로 드러나는가? 얼핏보기엔 동일한 삶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들고….

    2. 오히려 예수를 통해 드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는’ 삶은 (또 얼핏) ‘삶’보다는 ‘전하는’에 더 방점이 찍히지 않나? 그렇다면 이것은 전통적인 복음 증거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기회가 되실 때 conceptual and practical 차이들을 좀 설명해 주심 감솨하겠슴다! 🙂

    1. 아… 아땅 박사님께서 또 날카로운 지적을… ㅎㅎ

      음…
      제가 얘기하고자 했던건 이런겁니다.

      구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들의 존재와 행위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라는 것.
      이것은, 특별히 구별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 이웃을 배려함으로써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 폭력과 거짓을 징벌함으로써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 등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결국 이런식으로 그 백성의 윤리적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반면, 제가 고민하는 것은,
      신약백성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예수를 전함으로써 그리고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전통적인 전도에 더 방점을 두는 겁니다. ^^

      제가 예전에 이 블로그에도 한번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야기한대로,
      선택-윤리-선교라는 framework이 아직 제게는 좀 fully convincing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구약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존재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라는 것이었다는 것에는 저도 완전 동의합니다만…

      사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약백성들도 그렇고, 제가 아는 제한된 지식으로서… 초기교회 역사속에 나타난 신약백성들도 그렇고…
      이들에게는 예수로 인해 새롭게 열린 시대에 대한 뉴스(유앙겔리온)를 전하는 것이 더 중점이었지, 그들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중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

      아직 뭐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잘 통합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베드로전서 2:9에 나오는 declare the praises of him [NIV] 또는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ESV]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43:21에 나오는 declare my praise [ESV]와 (chosen people이라는 공통점도 pivot으로 작용하여) 비슷한 표현인데, Joel Green은 이것을 두고, 베드로에게는 구약의 vertical language와 신약의 horizontal language가 다르지 않았다고 해석했더군.

    베드로의 편지와 그의 동료 요한의 편지 모두, 편지 전체 그림을 놓고 볼 때 그 선포의 형태로 삶의 방식 (거룩과 사랑, respectively)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자세를 넘어서, 선포의 형태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더라구.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형도 주지했듯이, 이 두 사람의 행동들 (selected and recorded by 누가) 을 보면, 예수의 삶/죽음/부활을 설명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채워나갔으니…

    이 두 가지가 단순 상보적이지는 않을진대, 결국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그 핵심적인 교집합을 간과한 결과인 것 같은데. 이 둘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든지 강조점을 두는 것은 contextual matter일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등장으로 선교의 컨텐츠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정립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싶네. 예수가 이스라엘됨을 성취한 것은 맞지만, 그 성취를 구현하는 몫은 남겨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이 편지에서 권하는 삶의 방식의 핵심을 예수에게 잇대는 모습이 분명해 보이고.

    1. 요즘 너 글빨이 장난 아니다!! ㅎㅎ
      (뭐 원래 글좀 썼었지.. ㅋㅋ)

      이건 네 허락 없이 그냥 메인 포스팅으로 긁어 올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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