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나,
조엘 오스틴 식의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들은,
낙관의 열매로서 결국 내가 잘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결국은 물질적 풍요나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나는 결코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meta narrative를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악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회복하시고,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judge하신다는 엄청난 scale의 낙관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하는 (혹은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세는,
낙관적인 자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그리고 나를 끔찍하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정도라면,
낙관적 자세를 견지할만 하지 않은가!
결국 낙관적 자세를 가지면 잘 되어서 내가 현실적으로 유익을 얻게된다는 그런 천박한 수준의 낙관론이 아니라,
결국은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붙들고 계시다는, 깊은 믿음으로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낙관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런 낙관적 자세를 통해서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나가시고,
역사를 진보시키시기도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더 넓게 선포하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세우기도 하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들을 되새겨 보고,
성경의 meta narrative를 이해해야만 가질수 있는 그런 깊은 낙관적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이런 희망속에 거하기(메타네러티브 낙관주의)랑 선지자적 비관주의랑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요?
Someone 님,
제 생각엔….
선지자적 비관주의는 short-term으로 보았을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관점이고,
궁극적 낙관론은, 결국은 (long-term)으로 보아 하나님의 뜻이 결국 성취된다는 관점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한,
궁극적 낙관론을 견지하려면,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찮다는 ‘여유’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