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의미, 변질

본질과 의미가 일치할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가령,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본질이 있다고 하자.
그 본질은 그러나 때에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home base의 의미를 줄수도 있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building block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헌신적 사랑의 예로 활용되어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guiding light의 역할의 의미가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의미를 잘 모아서 본질을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의미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만들어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의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사회를 구성하는 building block, 사랑의 헌신, 등등의 내용을 다 설명하고 그것을 모은다고 해도, 원래 본질이 부모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때로, 의미가 변질되는 것은 본질 없이 의미를 추구하다가 그렇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함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자.
어느순간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없어진채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만 남게되면, 그 자녀를 위한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 자체도 변질되어서 자녀를 들들 볶으며 과외를 시키고 자신의 성공의 대리품으로 자녀를 생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본질이 없이 의미만 남게되어 그 의미가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신앙에 있어서도 이런 것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부활에 대한 것도 역시 그렇다.
너무 쉽게 부활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 부활이 가지는 적용점… 등등에 뛰어들게되면, 부활이 원래 가지는 본질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게 되고…
현대 사화에서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미 자체도 변질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이런 절기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로 돌아가서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다시 세워내는 일을 반복해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절을 지내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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