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10)

만일 경게표지가 그렇게 인위적이거나 심지어는 임의적인(arbitrary) 것이라면…
그런 경계표지를 그렇게까지 목숨걸고 지킬 필요가 있겠나.
마카베오하에 나오는 것 같이, 돼지고기 먹는걸 가지고 자신의 일곱자녀에게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죽으라고 용기를 주는게 어머니가 할 일인가.

과연 어떤 경우에는 경계표지를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어떤 경우에는 경계표지를 우상시하지 말고 유연성을 가져야하는 것일까.

그 기준을 생각할때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그 경계표지가 identity를 결정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안티오쿠스가 그 유대인 어머니와 일곱 자녀에게 돼지고기를 강요한것은, 양돈농가를 돕기위해 돼지고기를 소비해라… 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 돼지고기를 먹는것 자체가 신앙고백의 문제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것을 강요하는 입장에는 그렇게 심하게 강요하는 이유가 그 신앙 본질, 신앙적 identity를 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먹는 것이 내가 누구인가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경계표지가 되어서 내가 이것을 먹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느쪽에 속해있느냐 하는 것이 드러나는 상황이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혹은 술한잔 받으라고 강요하는 직장상사가 술을 거부하는 20년 후배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 이 직장에서는 네 신앙보다 내 권위가 우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술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2. 그 경계표지가 잘못된 형태로 추앙되어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지라… 경계표지 자체의 원래 주어진 역할을 오해하거나 그것에 경계표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때가 있다.
가령 바울서신에서 나오는 할례가 그랬다.
할례는 경계표지였다.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할례는 하나님 백성이 되고 나면 자신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뱃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술 마시면 구원 못 얻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옳지 않은 것이다. 경계표지를 지킴으로써 그 경계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경계에 속한 일종의 표식으로써 경계표지를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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