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복음을 아는 건가?

정말 이 사람이 복음을 알고 있는걸까?

어떤 사람을 쉽게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참 건강하지도 못하고 바람직하지도 못할 뿐더러, 여러 방면에서 파괴적이다.
그러니, 언제든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순간이 되면 재빨리 어떻게든 그 순간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그렇지만,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혹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런저런 형태로 소위 ‘영적 리더십’이라는 것을 행사해야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이 과연 복음을 알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음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정말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한 경우는, 적어도 내 경험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반면,
그 사람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그 사람은 그저 상황과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사람은 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니 고민이다.
어떤 사람이,
정말 복음을 알지못한다고 보일때,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냥 받아주고 그저 다양성의 일부로 인정해주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들을 더 해보아야 하는 걸까.

역겨운 위선

  1. 회사에서 무슨 프로젝트가 잘 되었다는 이메일이 돌면, 그 뒤에 사람들이 줄줄이 축하한다, 아주 훌륭하다, 모두가 한팀이 되어 이 일을 해내기 기쁘다, unbelievable, amazing, outstanding과 같은 단어들을 써가면서 칭찬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잘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예의상 그렇게 쓰는 거다.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회사에서는 자꾸만 표현의 inflation이 심해진다.
    unbelievable, excellent, superb, amazing과 같은 말들이 자꾸 나오는데… 그런 말들을 너무 계속 쓰다보니 그냥 그렇게 쓰는게 별 감흥이 없게 되었다.

  2. 회사에서 executive들이 흔히, 직원들이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직원들의 만족이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서, 이 멋진 vision에 다 같이 헌신해서 가자…
    뭐 이렇게 말하는데…
    아… 그 사람들이 그거 진심으로 이야기하는거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것에 박수쳐주면서 호응하는 사람들도 그거 거짓이라는거 아는데… 그냥 다 같이 거짓말의 홍수 속에 춤을 춘다. 그냥 다 그런다.
    그냥 과장, 거짓말등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3. 이런식으로 매우 흔한 위선이 이번 대량 layoff 사태들을 겪으면서 더 적나라하게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여러가지 표현들을 써가며… 어떻게든 있는 직원들은 일하게 만들려는 시도들.
    해고당한 사람들을 위하는척 하면서 괜히 자기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떠벌리고 싶어하는 linkedin의 포스팅들.
    막상 해고당한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기보다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4. 이 와중에 위선 없이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도 물론 있다.
    이번에 정리해고 당해서 없어진 사람의 자리로 살짝 승진하면서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는 사람.

우아…
정말 참 역겨운 모습을 참 많이 본다.

묵상과 기도

새해 조금 더 깊이 있는 묵상과 기도를 위한 방법들을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중 Tim Keller가 자신이 기도를 하는 이야기를 하는 Podcast 하나를 들었다.

그분이 지난 몇년간 췌장암 4기와 싸우면서 기도가 깊어졌다고 했는데,
그중 기도를 하기위해 다음과 같은 루틴을 사용한다고 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질 때 까지 계속 그 말씀을 묵상을 한다.
그 후에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그때 기도를 한다고.

생각해보면,
꽤 오랫동안 내가 기도를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는다.

아… 내가 기도하는 법을 잃어버렸었구나 ㅠㅠ

다시 묵상과 기도의 루틴을 잘 만들어보려고 지금 노력중이다.

Prayer of Lament

Google의 Christian group 이메일을 계속 받아보고 있다.
거기서 이런 이메일이 왔다.

오늘부터 점심시간마다 lay-off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애통의 기도 (prayer of lament)를 매일 하려고 한다.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은 sign-up 해라.

우아…
나는 머리를 띵 하고 얻어맞은 듯 했다.
그래…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layoff 당했고,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너무 큰 충격과 혼란 속에 있어서 어떻게 도와주어야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이런게 필요하겠구나.

나도 layoff 당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한동안은 아무 이메일도 체크하기 싫었고,
누가 내게 잘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대답하는 것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 우리동네에 있는 금식 기도원에 하루가서 기도하고 오고 그랬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layoff 당한 상황이 많이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데…
나도 그런 prayer of lament에 동참해야겠다.

새해에 다시 읽고자 하는 책들

Rekindle하자는 의미로 다음의 책들을 새로 혹은 일부 책들은 다시 읽으려 계획하고 있다. (일부는 이미 읽기 시작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앤드류 머레이, 겸손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 Tim Keller, The Songs of Jesus

그야말로 ‘경건서적’이다.
정말… 조금 경건해지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

AI generated sermon

내가 가끔 보는 youtube channel중에 Matt Whitman이라는 목사의 채널이 있다.

최근에 이분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았다.
– 본문을 하나 선정한 후에,
– 그 본문으로 자신이 짧은 설교문을 하나 쓰고,
– 그 본문을 AI에게 주어서 AI가 설교문을 쓰도록 했다. (ChatGPT)

그랬는데…
정말 놀랍게도,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어떤 것이 AI가 설교한 것인지, 어떤 것이 그 목사님이 설교문을 쓴 것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음…
그런데… 이런 발칙한 생각도 해 보았다.

영 이상한 설교를 하는 목사님보다는 차라리…
좋은 신학서적과 좋은 설교들로 잘 훈련시킨 AI가 더 좋은 설교를 하지 않을까?

Survivor’s Guilt

지난주, 회사에서 아주 큰 스케일의 lay-off가 있었다.
전체의 15%가 lay-off되었다고 한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연말까지 마지막으로 정말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새해 회사로 돌아오자 곧 lay-off 되었다.

이렇게 큰 scale의 lay-off가 벌어지면 lay-off된 사람들에게 물론 가장 큰 충격이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충격이 꽤 크다.

Survivor’s guilt.

나름, 여러번의 lay-off들을 겪었다.
그중 한번은 다들 집단으로 lay-off 되기 전에 내가 나왔었고,
한번은 lay-off 당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번엔 아마도 survivor’s guilt가 그래도 좀 오래갈 것 같다.

Rekindle (9)

그래서…
내게 있었던/아직 남아있는 어떤 ‘불’을 다시 활활타도록 하는 일을 하기위해 새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첫째,
내 자세를 고쳐 잡는다. 기본적으로 성령께 더 의존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성령의 음성에 적극적으로 순종한다.

둘째,나를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게 했던 소중한 개념들 (은혜, 사랑, 회복, 의미) 등등에 다시 천착해본다. 이것은 그 내용들을 더 공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그 개념들을 그야말로 깊게 곱씹어가며 다시 그 의미들을 깊게 새겨보는 노력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세째,
신앙의 일반화를 추구하는 노력을 조금 줄이고, 내게 있어 의미있었던 주관적 신앙의 경험들을 다시 되새김질 해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신학적으로 다소 더 narrow해지는 것을 의미할수도 있겠다.

다섯째,
기도를 조금 더 깊게, 자주 한다. 그리고 기도를 조금 더 배운다.

Rekindle 이것이 나름대로 내 새해의 결심이다.

Rekindle (8)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도 또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성품과, 내가 경험한 신앙 경험들, 내 눈이 열려 보게된 진리의 어떤 내용들은 매우 내게 unique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내 신앙에 있어 rekindle하는 작업을 할때는 일반화된 신학적 설명으로부터 출발하기 보다는 다소 주관적인 내 신앙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지난 몇년동안 내 신앙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신앙을 나와는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 의미 있는 열매들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혹시 내가 나의 ‘주관적 신앙경험’들을 너무 쉽게 구석에 버려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내가 새해들어 rekindle이라는 keyword를 가지고 새해 결심을 정리해보면서 과거 내 신앙 경험들, 내게 있어 복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곱씹어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Rekindle (7)

내가 처음 복음에 눈을 떴을때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은혜’라는 개념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세상 어느곳에서도 완전한 ‘은혜’라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런 것을 주장하는 성경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내게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십자가가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을 읽으며 나는 정말 전율을 느꼈다.
그때 그 군중 속에 내가 있다고 정말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강력하게 그 은혜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이었고, 여전히 그 은혜를 받아들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데… 아니 그런 내게 은혜라니…

그래서 그 ‘은혜’를 받아들인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면 나는 어느새 내 생각 한 구석에… 나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건… 어쩌면 내가 ‘불’을 잃어버리게된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

다시 어떻게든 그 충격적으로 은혜라는 개념을 맞닥드렸던 그때의 내 모습을 회복해야한다. 여전히 은혜라는 것이 내게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내 마음 한 구석에 계속 마치 내가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

그리고 역시 적어도 내게있어 그 은혜의 궁극의 표현은 십자가다.

은혜의 십자가. 다시 rekindle되어야 하는 또 다른 영역.